왜선장(倭船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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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부터 초청받아서 전함(戰艦)을 건조하고 수리하던 왜 출신의 장인.

개설

조선에서 국토방위와 수호 목적의 전함을 개발하고 건조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인접국인 왜로부터 동남해안 침입을 자주 받아서 이를 대비하기 위한 전함을 준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조선에서 병선 건조와 기술 향상, 장인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담당 직무

왜적 침입이 확산되자, 조정은 병선장과 목수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조정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선장과 목수를 활용해서 병선을 건조해서 왜구 침입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대선이 신속하지 못해서 왜적과 마주치면 추격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조정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맹선(中猛船)을 개조해서 왜적을 방어하는 조처를 취하였다(『세종실록』 10년 10월 20일). 그제야 병선 건조 기술 향상은 조선과 백성을 지키는 국방의 초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정은 왜와 유구국에서 선장을 초빙해서 병선을 건조하도록 결정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주로 활동한 외국인 선장은 등차랑(藤次郞)과 오보야고(吾甫也古), 삼보라(三甫羅), 오부사두(吾夫沙豆) 등 왜와 유구국 출신이었다. 조정은 선장과 그의 부인에게 매월 급료와 쌀과 콩과 같은 양곡을 하사해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세종실록』 16년 9월 26일). 조선 조정은 왜의 침입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왜선장을 불러들여서 조선의 병선 건조를 이끌어가는 것에 대해서 정보 누출 등을 염려해서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태종실록』 17년 윤5월 19일).

사수감(司水監)은 경강(京江)에서 동자갑선(冬字甲船)과 상쾌선(上快船), 왕자갑선(往字甲船)을, 유구국 선장은 월자갑선(月字甲船)을 건조하였다. 빠르기는 조선의 배가, 견고함은 유구국 배가 앞섰다. 조정은 각 포(浦) 전함을 동자(冬字)와 왕자(往字)의 시험선을 견본으로 해서 만들고, 유구국 선장이 만든 월자선(月字船)은 하체가 견실하니 이들을 견양(見樣)으로 삼으라 하였다(『세종실록』 16년 9월 23일).

왜선(倭船)은 판자가 얇고, 쇠못을 많이 사용하였고, 몸체가 좁고, 속이 깊으며 양 끝은 뾰족해서 오고 가는 데 경쾌하고 편리하지만, 동요(動搖)하면 못 구멍[釘穴]이 차츰차츰 넓어져 물이 새어서 부패하기 쉽다. 조선의 병선이 몸체가 커서 무거워도 나무못[木釘]이 젖으면 젖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사실을 아는 일부 관료들은 10년 동안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일부 관료는 병법(兵法)에 전하는 높은 곳에 있는 자가 승리한다는 원리를 내세워서 조선 병선이 왜선에 비해서 1/3 높아서 전투에 매우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성종실록』 4년 12월 26일).

참고문헌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대출판부, 1973.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韓國軍制史』, 육군본부,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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