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왕궁(完王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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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고종 5) 고종과 영보당 이씨 사이에 태어난 완왕 이선의 제사를 담당하던 부서 혹은 완왕을 지칭.

개설

1868년 윤4월 10일에 운현궁에서 고종과 영보당(永保堂) 귀인이씨(貴人李氏) 사이에 출생한 이선(李墡)을 사후에 왕으로 추봉(追封)하여 완왕(完王)이라고 하고 그 제사를 담당하게 하던 관서를 완왕궁이라 했다. 완왕궁은 한양의 재동에서 제사와 제전(祭田)을 관리하였으며, 완왕을 의미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완왕은 후궁의 소생이므로 완화군(完和君)으로 불렸는데, 이 때문에 완왕궁을 완화궁(完和宮)으로 부르기도 했다.

내용 및 특징

완왕은 9세인 1876년(고종 13) 완화군에 봉해졌고 1878년(고종 15) 관례를 올렸으나 1880년(고종 17)에 1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고종은 효헌(孝憲)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묘소는 양주 월곡리에 조성되었다. 이 묘소를 관리하던 곳이 완왕궁이었다. 완왕궁은 완왕을 의미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는데, 완왕이 죽을 때까지 거처했던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의 집을 사후에 완왕궁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완왕은 1907년(융희 1)에 순종이 즉위하면서 완친왕(完親王)으로 봉해졌다(『순종실록』 즉위년 10월 1일). 이때부터 완왕궁이라는 용어가 함께 사용되었다. 생모인 영보당 이씨는 1843년(헌종 9)에 출생하여 경복궁 궁인으로 처음 입궁하였다. 완왕을 출산한 뒤 영보당이라는 당호를 받았으며 1880년(고종 17) 숙원(淑媛)이 되었고 1906년(광무 10) 귀인에 봉해졌다. 그녀는 완왕궁에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 12월 노령으로 사망하여 완왕의 묘소 인근에 안장되었다.

변천

완왕궁은 일제 강점기에도 존속하였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면서 황실은 이왕가(李王家)로 재편되었고, 그 관리를 이왕직(李王職)에서 담당하였다. 이왕직에서는 이왕가 전래의 능원묘를 관리하면서 각종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로 인해 완왕궁의 제사도 지속되었으며 이왕직으로부터 운영자금 등을 지원받았다. 예컨대 1911년의 완왕궁 제향비(祭享費)와 궁묘(宮墓) 경비 및 궁묘 용원(傭員) 정원(定員)을 순화궁(順和宮) 경빈묘(慶嬪墓)의 사례대로 하고, 이왕직 장사계(掌祀係)에서 그 일을 전담하였다. 또한 완왕궁에 소속된 전답(田畓)은 이왕직 회계계(會計係)에서 맡아 관리하도록 하였다(『순종실록부록』 4년 6월 26일). 1912년에는 완왕궁의 제반 사무를 특별 처리하던 것을 다시 이왕직에 소속시키고, 일체의 재산을 재차 정리하였다. 이때 향사(享祀) 등의 절차는 이왕직 장사계에서 관장하고, 봄가을에 지내는 절향(節享)과 청명(淸明) 때의 기신묘제(忌辰墓祭)는 다른 원묘(園墓)의 사례에 따라 시행하도록 조정했다. 또한 제향 경비와 궁묘(宮墓) 경비 및 용원(傭員) 정원은 순화궁 경빈묘의 사례에 따라 규정을 정했다(『순종실록부록』 5년 7월 1일).

그런데 완왕궁의 재산은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1912년부터 신문 지상에 완왕궁에서 관리하던 전라도의 제전(祭田)을 이용하여 사기 행각을 벌린 것이 보도되었다. 이 사건은 영보당 이씨가 관련된 것으로 당시 이왕직에서 관리하던 완왕궁의 제전을 양도받아 매각하려던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 『매일신보(每日新報)』
  • 『동아일보(東亞日報)』
  • 곤도 시로스께 저·이연숙 역, 『대한제국 황실비사』, 이마고, 2007.
  • 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 일지사, 1987.
  • 김을한, 『인간 영친왕』, 탐구당, 1981.
  • 오타베 유지 저·황정성 역,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 동아일보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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