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물상지(玩物喪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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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물에 빠져 본심을 잃는다는 말.

개설

완물상지(玩物喪志)는 『서경(書經)』「여오(旅獒)」에 나오는 말이다. 주 무왕에게 여(旅)나라의 사신이 큰 개 한 마리를 바치자 무왕이 기뻐하며 큰 선물을 내렸는데, 이때 소공(召公)이 글을 올려 간언하기를, "사람을 가지고 놀면 덕을 잃고, 물건을 가지고 놀면 뜻을 잃습니다[玩人喪德 玩物喪志]"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무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정치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물건, 즉 ‘물(物)’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물질적, 정서적, 오락적으로 누리는 것을 통틀어 가리킨다. 그런 까닭에 송나라의 유학자 정호(程顥)는 사양좌(謝良佐)가 사서(史書)를 잘 외우며 박학다식한 것을 자부하자, "잘 외우고 많이 알기만 하는 것은 물건을 가지고 놀면서 본심을 잃는 것과 같다[以記誦博識 爲玩物喪志]"며 경계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사유와 행동 양식을 규제하는 내적 법도로 작용한 완물상지는 ‘외물(外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기본적으로는 외적 기물(器物)을 경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숙종실록』에는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놀이를 구경하느라 왕이 직무에 소홀하다는 소식을 접한 김호(金灝)가 완물상지를 들어 경계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숙종실록』 20년 11월 7일).

그런데 완물상지는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여 새로운 논의를 이끌어 내게 된다. 유학자들은 외물보다는 본심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완물상지는 그들이 학문, 그중에서도 경학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경학의 반대편에 있던 사장학은 외면되거나 부정되었고, 문학과 예술의 가치는 폄하될 수밖에 없었다. 정자(程子)가 "글을 지으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면 도에 해롭다."고 한 것은 이런 예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인 정인홍도 "문학의 해로움은 홍수보다 더 심하다."고 주장했는데, 이 또한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사장학보다 경학을 강조하고, 문학과 예술보다 학문의 가치를 우위에 두는 도본문말론(道本文末論)이 바로 이 완물상지에서 파생된 논리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사장학을 배제하고 경학을 중심으로 제왕학을 구성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 많이 등장한다. 사대부들은 사장학이 화려한 문장으로 사람의 이목이나 즐겁게 하고 형식과 수사(修辭)에만 집중하는 소인(騷人)과 일사(逸士)의 일이라 폄하하고, 경학을 통해 내심을 바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물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 등 매우 다양한 영역으로까지 외물의 범위를 확장하여, 이를 관리하고 제어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사회와 사물에 대한 인식이 변화함에 따라 외물에 대해 경계하는 정도는 차츰 느슨해졌다.

변천

완물상지는 사대부들을 규제하는 내적 법도로 작용하며, 유희적이고 문학적이며 정서적이고 예술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억제했다. 그러나 늘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사장학을 연구하며 문학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한 수많은 문인들은 ‘도본문말론’에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여 ‘도를 실어 나르는 도구’로서의 문학과 예술의 가치를 긍정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도와 문장을 분리하여 문학과 예술의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18세기 초 조구명(趙龜命)이 제기한 도문분리론(道文分離論), 즉 도와 문장은 별개라는 논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학이 더 이상 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반쪽짜리가 아니라 온전한 개체로 우뚝 설 수 있는 이론적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더하여 18세기 이후 조선을 휩쓴 소품문(小品文)의 유행과 ‘벽(癖)’과 ‘치(痴)’에 대한 긍정과 탐닉 등은, 그동안 완물상지 때문에 관심을 둘 수 없었던 수많은 외물을 가지고 놀 수 있게 만들었다. 그에 따라 문인들은 도가 아닌 진정(眞情)에 토대를 두고 작품을 창작하였고, 자신의 도서관에 수만권의 장서를 구비한 채 서화와 골동 등으로 집안을 장식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비둘기와 앵무새를 키우는 사람, 꽃과 물고기를 관찰하는 사람도 생겨났으며, 잘 꾸며진 정원이 사대부의 저택을 화려하게 변화시켰다. 조선시대 후기에 접어들어 완물상지의 구속력이 약해지면서, 사대부들의 생활 환경과 문학 활동 전반에 굉장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이 무렵에는 이용후생과 실사구시를 기치로 내건 실학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어 완물상지의 완고한 성채를 허물어 버렸다. 실학 정신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은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객관 사물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이해의 폭을 넓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을 만들어 냈다. 그 결과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 등 매우 흥미로운 저작들이 탄생하였다. 이후로 외물은 더 이상 본심을 해치는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참고문헌

  • 김기봉,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완물상지(玩物喪志): 21세기 실학으로서 시민인문학」, 『시민인문학』18호, 경기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0.
  • 박경남, 「조구명(趙龜命) 도문분리론(道文分離論)의 변화와 독자적 인식의 표현으로서의 문학」, 『국문학연구』17집, 국어국문학회, 2008.
  • 박낙규·서진희, 「송대 이학(理學)의 예술, 미학사상」, 『인문과학논총』45집,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01.
  • 정민, 「18세기 지식인의 완물(玩物) 취미와 지적 경향 - 『발합경』과 『녹앵무경』을 중심으로」, 『고전문학연구』23집, 한국고전문학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