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구(碗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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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포에 장착하는 발사체를 곡사로 발사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전방의 장애물을 넘어 적진을 공격할 때 사용하던 화기.

개설

1407년(태종 7)에 만들어진 곡사 화기의 일종이다. 주로 적의 거점 내지는 방어 시설을 타격할 때 사용하였다. 직사화기로 뚫을 수 없는 장애물이 있는 경우에 그것을 넘어 공격하는 화기로 약실(藥室)보다 발사체가 발사되는 포구의 지름이 넓다. 포를 발사하거나 이동할 때에 사용하는 손잡이가 두 개 있는데, 선혈(線穴) 약실 위에 좌우로 붙어 있다. 또한 발사 각도가 높아야 했으므로 화기의 발사구가 하늘을 향했다.

개발 초기에는 구리로 만들었으나, 점차 쇠로 바뀌었다. 1422년(세종 4) 8월 전국 해안에 연대(烟臺)를 증축하고 수철 화통식 완구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비격진천뢰를 완구에 사용하여 경주성을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인조대에 간행된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에는 완구를 대완구(大碗口), 중완구(中碗口), 소완구(小碗口), 소소완구(小小碗口) 등 4종으로 구분하였다. 1813년(순조 13) 박종경(朴宗慶)이 편집, 간행한 『융원필비(戎垣必備)』에는 별대완구(別大碗口), 대완구, 소완구, 소소완구 등으로 구분하였다.

내용 및 특징

당시에는 완구의 제조에 사용하는 철물이 변화되었다. 당시까지 화통완구(火㷁碗口)는 오직 동철(銅鐵)을 이용하여 주물로 만들었다. 동철은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아 대마도경차관(對馬島敬差官)이예(李藝)가 중국에서 무쇠로 제작한 화통완구를 구해 왔다. 이후부터 군기감 등에서 완구를 무쇠로 만들어 사용하였다(『세종실록』 즉위년 8월 14일). 완구는 주로 중앙에서 제작되었고, 지방에서 필요한 경우 장인을 내려보내 만들도록 했다(『세종실록』 19년 7월 27일).

완구의 단점은 이동이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시대 화기들의 일반적 문제이기도 했다. 운반하는 기물이 발명되지 않아 수레에 싣거나 인력으로 운반해야 하는 고충이 있었다. 결국 진보나 연대 등 고정된 시설에 두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세종실록』 19년 7월 18일).

세종대에는 완구의 이동 여부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되기도 하였다. 대완구는 너무 무거워서 싣고 부리기가 어려워 이동이 불가능했고, 중완구는 성을 공격하는 데 편리했으며 수레나 말에 실을 수 있었다(『세종실록』 19년 7월 27일).

변천

19세기 말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근대적 전장식(前裝式) 화포가 도입되면서 조선 전래의 화기들은 사라졌으며, 완구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징비록(懲毖錄)』
  • 『기효신서(紀效新書)』
  •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
  • 『융원필비(戎垣必備)』
  • 박재광, 『화염조선』, 글항아리, 2009.
  • 육군본부, 『한국군사사』13, 경인문화사, 2012.
  • 허선도, 『조선시대 화약병기사 연구』, 일조각, 1994.
  • 이왕무, 「광해군대 화기도감에 대한 연구」, 『민족문화』21,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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