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광평(阮光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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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년부터 1802년까지 존재하였던 베트남 서산왕조(西山王朝)의 군주.

개설

1771년 베트남 남부의 마을에서 완문혜(阮文惠) 삼형제가 지배 세력에 대항·봉기하여 서산왕조(西山王朝)를 세웠다. 이들 세력은 북부의 진씨(鄭氏) 세력, 남부의 광남국(廣南國)을 무너뜨리고, 결국 청나라의 지원을 받던 려(黎)왕조까지 멸망시켰다. 1788년 완문혜는 황제에 올랐으며, 1790년 완광평(阮光平)이라는 이름으로 조카를 청나라에 보내, 건륭제의 책봉을 받았다. 1792년 완문혜가 즉위한 지 4년 만에 죽은 이후, 서산왕조는 쇠퇴하여 광남국(廣南國)완씨(阮氏)의 남은 세력이었던 완복영(阮福映)이 세운 완조(阮朝)에게 1802년 멸망하였다.

활동 사항

18세기의 베트남에서는 려왕조의 황제가 명목상의 황제로 전락하고, 북부의 진씨(鄭氏), 남부의 완씨가 세운 광남국(廣南國)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1771년 평정성(平定城) 소재 서산(西山) 마을에서는 광남국의 폭정에 항거하며 완문악(阮文岳)·완문여(阮文侶)·완문혜(阮文惠) 삼형제가 주도한 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의병을 조직하고 세도가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고, 농민들이 군에 가담하면서 세력이 커져 갔다. 이들은 초기 려왕조의 복권을 주창하며 1777년에 가정(嘉定: 현 호치민)에서 완씨, 1786년에는 승룡(昇龍: 현 하노이)에서 진씨까지 멸망시켰다. 승룡에서의 전투를 지휘하였던 완문혜는 려왕조를 부흥시키겠다고 했던 약속에 따라 소통제(昭統帝)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남부지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린 황제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완문혜는 다시 승룡을 공격하였다. 이에 려왕조는 청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양광총독(兩廣總督)손사의(孫士毅)는 이번이 안남의 옛 땅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하며 건륭제의 동의를 얻은 후, 1788년 10월 원정에 나섰다. 청군의 침입에 직면한 완문혜는 베트남의 합법적인 지배자로서 청과 전쟁을 벌이기 위하여 11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광중(光中)으로 정하였다. 완문혜는 100,000이 넘는 군대를 정비하여, 1789년 1월 5일 구정(舊正)을 이용하여 방비가 소홀해진 청군을 공격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청군이 패하자 소통제와 황후 및 측근들은 청으로 달아나 버려, 결국 려왕조가 멸망하였다.

청에 대하여 군사적으로 승리하였지만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청의 책봉이 필요하였던 완문혜는 완광평(阮光平)이라는 가명으로 조카 완광현(阮光顯)을 자신인 것처럼 꾸며 청에 사절로 보내, 안남 왕으로 책봉을 약속받았다. 완문혜는 1890년 열하(熱河)에서 열린 건륭제의 팔순만수축전에 자신의 조카 범공치(范公治)를 자신인 것처럼 꾸며 사절을 보냈다. 이상 두 차례 안남 측 사절단에 대한 정보를, 청에 사행 중이었던 조선 측 사절단이 귀국 후 보고하였다(『정조실록』 14년 3월 27일)(『정조실록』 14년 3월 27일)(『정조실록』 14년 9월 27일).

한편으로 완문혜는 청 남부의 해적들에게 관직을 주어 청 연안 지방을 공격하도록 하거나, 광서성(廣西省) 지방의 반청결사집단 천지회(天地會)를 도와주는 등 청나라에 대한 공세를 이어 갔다. 하지만 1792년 완문혜가 40세의 이른 나이에 죽고, 이후 서산왕조는 정치적 불안과 외부의 공격 속에 완복영(阮福映)이 세운 완조(阮朝)에게 1802년 멸망당하였다.

묘소

묘소는 단양릉(丹陽陵)이다.

참고문헌

  • 다이앤 머레이 지음, 이영옥 옮김, 『그들의 바다: 남부 중국의 해적, 1790-1810』, 심산 , 2003.
  • 송정남, 『베트남의 역사』, 부산대학교 출판부 , 2000.
  • 유인선,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창비, 2012.
  • 유장근, 「18세기 말 월중관계의 일연구: 서산당 사건을 중심으로」, 『慶大史論』 창간호,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