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부(臥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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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길이가 긴 가마.

개설

와부(臥釜)는 누워있는 가마라는 의미로 길이가 긴 등요(登窯)를 지칭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자기를 만드는 일반적인 가마는 대부분 긴 터널 형태로 구릉의 사면을 따라 자리했다. 그러한 모습 때문에 오름가마라고도 불리며, 길이가 긴 겉모습이 마치 용의 모습과 같아 용요(龍窯)라고도 했다.

내용 및 특징

와부는 구릉의 경사면에 길게 들어선 등요의 모습을 빗댄 단어로 와요(臥窯)라고도 불린다. 조선의 자기 가마는 대부분 등요이며, 아궁이에 땔감을 넣어 가마 전체를 달군 다음 가마 측면의 구멍으로 땔감을 넣어가며 불길을 굴뚝까지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그릇을 구웠다. 일반적으로 가마가 긴 터널 형태이므로 불길 역시 가마의 경사를 따라 완만하게 누워 오른다. 등요는 가마의 길이가 길어서 한 번에 많은 양의 그릇을 제작할 수 있지만, 긴 길이 때문에 불을 한곳으로 집약시켜 열효율을 극대화하기는 어렵다. 가마가 길어 유지, 보수해야 하는 부분도 상대적으로 많다.

조선시대 관요 백자는 대부분 등요에서 제작되었으므로 가마의 특성과 한계점을 파악하는 것은 업무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1493년(성종 24)에 중국의 사정을 접한 사옹원(司饔院) 제조(提調)유자광(柳子光)은 왕에게 등요인 와부의 약점을 설명하고 그것의 대안으로 중국식 입부(立釜)의 도입을 건의하였다(『성종실록』 24년 5월 18일). 왕은 와부와 입부의 모형을 통해 각 가마의 특성을 보고받은 다음 새로운 형태의 가마를 실험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유자광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관요의 백자 생산에 입부의 적극적인 도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493년에 유자광에게 중국의 입부 기술을 전달해준 오신손(吳愼孫)은 도화서의 화원(畵員)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신손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에 화원으로 참여하였을 것이다. 사신단에 배속된 화원은 사행 중에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오신손은 중국에서 백자를 제작하는 방식과 특징을 파악하여 사옹원제조였던 유자광에게 전했을 것이다.

변천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질그릇은 별다른 시설 없이 평지에서 구웠다. 빗살무늬 질그릇은 단순히 땔감 위에 그릇을 놓고 그 위에 땔감을 올려 굽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열 손실이 많아 단단한 그릇을 만들 수 없었다.

구릉에 굴을 파서 만든 굴가마는 평지에서 그릇을 굽는 것에 비해 품질이 우수한 질그릇을 제작할 수 있었다. 굴속에 공기를 가두어 환원 상태에서 그릇을 구워낼 수 있게 된 이후 가마의 형태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지하굴식 가마에서 반지하식 가마를 거쳐 등요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등요는 구릉의 사면을 굴착하고 그 위로 반원형의 천장을 올려 긴 터널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구릉 아래쪽에 아궁이를 만들고 구릉의 위쪽에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는 배연 시설을 마련했다. 등요 내부의 그릇은 구릉 사면을 따라 오르는 불길에 의해 구워졌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초기 청자는 주로 벽돌로 만든 등요에서 제작되었다. 11세기 이후 청자 생산 기술의 발달과 함께 가마를 만드는 재료가 벽돌에서 진흙으로 바뀌었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등요는 벽돌 가마에 비해 외부 공기를 차단하는 효과가 높아서 질 좋은 청자를 만들 수 있었다.

등요는 조선시대에 백자를 제작할 때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등요 내부를 칸으로 나눈 칸가마가 등장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가마 안의 열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한 칸짜리 등요는 가마 바닥이 긴 경사면으로 이루어진 데 비해 칸가마는 바닥이 각 칸마다 계단식으로 마련되어 가마 내부에 그릇을 보다 안정적으로 쌓을 수 있었다.

참고문헌

  • 강경숙, 『한국 도자기 가마터 연구』, 시공사, 2005.
  • 웅해당 지음, 김재열 옮김, 『동아시아 요업기술 발전과 교류사 연구』, 학연문화사, 201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