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적합(兀狄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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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면서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대표적인 여진 종족.

개설

올적합은 우디거(udige)의 한자 음역어로, 우지개(亏知介, 亐知介, 于知介), 우지합(亏知哈, 亏知哈, 亐知哈), 우적개(亏狄介), 우적합(亏狄哈) 등으로도 나타났다. 우디거라는 말은 ‘숲 사람’이라는 뜻으로, 우디는 여진어(만주어)의 워지(weji)와 상통하며, 조선에서 수렵 생활을 하던 종족을 가리키거나 만주 지역의 송화강과 흑룡강 일대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살던 북방 퉁구스 계통의 여러 종족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명의 해서여진(海西女眞)·야인여진(野人女眞)과 일부 관련되어 있었고, 세부적으로는 홀라온(忽剌溫)·혐진(嫌眞)·골간(骨看)·니마차(尼麻車)·오을미차(亐乙未車)·이을구차(伊乙仇車)·오을구차(亐乙仇車)·도골(都骨)·남눌(南訥)·사차(沙車) 등 다양한 종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올적합의 추장들은 조선에 내조(來朝)하여 관직을 받고, 한성으로 오는 등 교섭을 하였으나, 때때로 연합하여 노략질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러 종족의 올적합은 제종올적합(諸種兀狄哈), 제성올적합(諸姓兀狄哈)으로 표현되었으며, 경우에 따라 삼성(三姓)·사성(四姓)·오성(五姓)·칠성(七姓)·구성올적합(九姓兀狄哈) 등으로 불리었다. 올적합은 호전적인 종족으로 알려졌고, 올적합 300~400명으로 조선 군사 10,000명을 대적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성종실록』 22년 4월 25일).

조직 및 역할

올적합은 여진 종족으로 구성되어 그 기원을 찾기 어렵다. 주로 농경을 하였던 알타리(斡朶里 혹은 吾都里)·올량합(兀良哈) 등과는 달리 송화강 유역부터 두만강 일대에 이르는 산림과 초원 지역에 거주하였으므로 그들을 하나의 종족으로 특정할 수 없다. 15세기 초반 이후 올적합은 남하하는 양상을 보였고, 점차 농경의 비중이 커졌으며 조선이나 명과의 교역도 잦아졌다. 함경북도의 종성(鍾城)~경흥(慶興)에 이르는 두만강 하류를 둘러싼 형세였다.

변천

올적합은 고려말부터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면서 고려(조선)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399년 정종은 길주도진무(吉州都鎭撫)신분(辛奮)을 보내어 내조한 올적합 사람에게 술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정종실록』 1년 1월 19일). 1405년에 올적합은 2차례에 걸친 명나라 사신의 초무(招撫)를 거부하고 조선의 변경에 머물렀으며, 이해 6월 태종은 서울에 머물던 올적합 등의 여진인들에게 의복을 내리는 등 회유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5년 6월 6일).

태종 연간 올적합은 두만강 상류의 올량합·알타리 등의 여진과 여러 차례 갈등을 겪으며, 원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조선에서 이를 틈타 세종대에 육진(六鎭) 설치를 완료하여 두만강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었다. 이로써 세조대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두만강 유역 여진 종족과의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455년 조선의 병마도통사(兵馬都統使)로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수양대군이 두만강 유역의 여진 종족을 세력과 거주지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단종실록』 3년 3월 24일). 이때 올적합의 여러 종족 가운데 골간 올적합만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를 통하여 조선이 두만강 하류의 일부 세력에게만 영향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조선과 올적합의 관계는 세조 연간에 이르러 안정적인 양상을 보였으며, 특히 골간 올적합은 자주 내조하여 토산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었다. 이 시기까지 올적합은 올량합이나 알타리와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서로 공격하는 일이 잦았는데, 조선에서 그들의 화해를 중재하는 경우도 있었다(『세조실록』 5년 1월 29일). 홀라온 올적합의 경우, 조선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 조선의 관직을 받은 인물도 있었고 몽골의 침입을 보고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11년 2월 7일).

조선과 올적합의 관계는 세조 말부터 예종대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소소한 군사적 충돌을 포함한 갈등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였으나, 성종대에 이르면 점차 안정되어 갔다. 이 시기는 양측이 가장 활발하게 교섭한 시기로 거의 모든 올적합이 조선과 관계하였다. 이전까지 골간·홀라온·니마차 등의 올적합 종족이 주로 조선에 내조하였다면 이후로는 여러 종족이 다양하게 내조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이전과 달리 올적합이 두만강 유역으로 남하한 뒤에 정착하고 농경 생활의 비중이 커져 갔던 점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성종대에도 올적합은 올량합이나 알타리와 꾸준히 적대하였고 조선의 중재 노력은 별다른 효과를 보이지 못하였다. 올적합은 성종대 이후로는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하지 못할 경우 보다 적극적으로 무력 침입을 감행하는 양상을 보였다. 조선과 올적합의 관계는 중종대 이후로 악화되었다. 명종 연간에는 올적합의 노략질을 조선이 방어하는 국면이 조성되었다(『명종실록』 4년 11월 9일). 또 선조대에는 두만강 유역의 번호(藩胡)들이 올적합과 연계하여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는 양상을 보였다(『선조실록』 27년 9월 28일). 올적합은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의 흥기 이후 여진 세력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건주여진(建州女眞)으로 병합되었다.

참고문헌

  • 『제승방략(制勝方略)』
  • 김구진, 「조선 전기 여진족의 2대 종족-오랑캐(兀良哈)와 우디캐(兀狄哈)」, 『백산학보』 68, 2004.
  • 김순남, 「조선 성종대 올적합에 대하여」, 『조선시대사학보』 4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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