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행(溫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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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나 왕비가 신병 치료를 위해 전국의 유명 온천에 행행하여 장기간 머물던 것.

개설

온행은 능행(陵幸)이나 원행(園幸)과 달리 왕의 신체 변화에 따라 실시하던 부정기적인 행행이다. 온행은 능행, 원행처럼 왕이 주체가 되어 거행했다. 그러나 능행과 원행 등은 매년 행행을 준비하고 대비하던 해당 관서에서 계획한 날짜와 순서에 따라 정기적으로 진행한 반면 온행은 왕의 건강 상태에 따라 갑자기 준비하여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초기부터 조선후기까지 왕마다 온행이 정기적이거나 유사한 양상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볼 때 온행은 왕이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식화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에서 왕의 예고 없는 온행은 관료들이 늘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행행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관료들은 왕의 행위는 그 어느 것도 공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보았다. 관료들의 입장에서 온행은 유교적 의례 절차를 무시하는 비정상적인 행행이었으며 왕이 개인적인 문제로 장기간 도성과 궁궐을 비워 두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정치적 문제라며 매번 반대하였다.

반면 왕의 입장에서도 개인적인 일이라고는 하지만 신체적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장기간 궁궐 밖에서 거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이 도성은 물론 근기(近畿)인 경기도를 벗어나 지방에서 지낸다는 것은 식사와 숙박은 물론 숙위(宿衛)를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하는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왕이 온행을 거행한다고 대내외적으로 공표한다는 것은 신병 치료의 마지막 수단이었다. 그래서 관료들도 온행의 기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결국에는 동참하였고, 온행이 비정례적인 행행이었음에도 왕실의 의례로 정착하였다.

내용 및 특징

온행은 왕의 개인적인 기호에 의해 부정기적으로 거행하던 행행이었다. 왕이 건강에 문제가 없으면 시행하지 않았으므로 온행을 거론하거나 준비한다는 것은 왕의 신변에 문제가 있음을 알리는 일이었다. 조선시대에 관절염이나 피부병은 온천욕 외에는 별다른 치료법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여서, 온천은 단기간에 별다른 약물 치료 없이도 병세를 호전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왕의 신체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진행하던 온행은 태조가 즉위한 시기부터 거행되었다. 태조는 1392년(태조 1) 8월 21일에 황해도 평주 온천으로 온행을 하였다(『태조실록』 1년 8월 21일). 평주 온천은 고려시대부터 왕족과 관료들이 자주 이용하던 온행 지역이라서 태조가 온행한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다만 태조의 즉위가 1392년 7월인 것을 감안한다면 보위에 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온행을 거행한 것이다. 이로 볼 때 왕의 온행은 여러 행행 중에서도 가장 앞서서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은 안질로 시력이 악화되어 수년간 정사를 보기에도 힘들다고 관료들에게 호소하였다(『세종실록』 23년 4월 4일). 세종은 온양·이천·배천 등 여러 온천에 다녔지만 10년 이상 효능을 보지 못해 온행에 부정적이었는데, 오히려 관료들이 세종의 안질을 고치기 위해 온행을 권유하였다(『세종실록』 25년 1월 10일). 결국 세종은 안질의 치료를 위해 온천이 아닌 냉천인 청주의 초수(椒水)에 가서 안질을 치료하였다. 세종은 안질에서 회복하였고 관료 중에서도 비슷한 병이 있는 자들에게 초수에서 치료할 것을 권유하였다(『세종실록』 26년 1월 27일). 세조는 안질·피부병 등을 치료하기 위해 도성과의 거리와 관계없이 각 지방으로 온행을 갔는데, 심지어 동래까지 온행을 가기도 했다. 현종도 역대 왕들에 비해 오랜 기간 온행을 했는데, 왕실 가족을 대동해서 온양에 한 달 이상을 머물렀다(『현종개수실록』 7년 5월 12일).

온행은 봄이나 가을에 주로 거행하였다. 날씨가 더우면 오랫동안 온천하기에 불편하여 날씨가 덥기 전에 일찍 떠나거나 기온이 내려가는 시기에 떠났다(『현종개수실록』 6년 4월 7일). 『온행등록(溫幸謄錄)』에도 온행의 시기가 모두 봄과 가을에 걸쳐 나타난다. 봄과 가을이 파종과 추수로 바쁜 농번기인 점을 감안한다면, 온행은 왕의 개인적 취향이나, 병세가 악화되어 최종적으로 내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온행 시기와 함께 온행지가 될 온천의 선정도 중요했다. 왕 개인의 취향과 병세에 따라 온천을 선정하였다. 예컨대 세종은 안질에 효능이 있던 초수를, 현종은 평주 온천은 너무 뜨겁고 이천은 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온양을 선택하였다(『현종개수실록』 6년 4월 7일). 온행을 결정하면 수행 인원을 정하고 재원을 장만했다. 온행에 어가를 시위하는 군병은 일반적인 행행에서와 같은 진법으로 배진(背陣)과 방진(方陣) 등을 운영하였다. 또한 온행의 수행원으로는 군병만이 아니라 각사(各司)의 관원도 1명 이상 참가하여 외조(外朝)를 구성했다. 왕은 궁궐을 벗어났다고 해서 정사를 멈추지 않았다. 온행이 아무리 왕의 개인 사정으로 진행하는 행행이라고 하지만 왕의 재가가 필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은 필요했다. 왕이 떠난 도성과 궁궐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유지하였으며, 궁궐 수비를 명령하는 군호도 평상시처럼 매일 전달하였다.

왕들은 온행을 거행하면서 지역의 유명 인물에 대한 탐문과 충절·효행이 뛰어난 자들에 대한 제사와 시상도 행하였다. 또한 온천으로 가는 길의 각 읍 중에서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명산대천에는 제사를 지냈다. 예컨대 태조와 세종대부터 온양에 온행하면 한강과 관악산, 직산의 성거산(聖居山)에서 제사를 지냈고 온천에도 고유제를 올렸다. 명산대천에 지내던 제사는 어가가 출발하기 전 새벽에 거행하였는데 행차의 안녕을 바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현종개수실록』 6년 4월 15일). 이 밖에도 대가(大駕)가 향교 앞을 지나게 되면 왕이 타는 가마인 연(輦)이나 말에서 내린 뒤 대성전을 참배하기도 했다.

온행은 일반적으로 도성 밖에 있는 온천에 행행했지만, 경복궁과 인접한 인경궁(仁慶宮)의 초정(椒井)을 이용한 경우도 많았다. 1661년(현종 2) 현종은 인경궁의 초정에 5일간 행행하여 목욕하였다(『현종실록』 2년 윤7월 22일). 인경궁의 초정은 인조대부터 왕비 등 왕실 여성이 자주 목욕하던 곳이다(『인조실록』 7년 7월 27일). 왕대비가 인경궁에서 목욕하는 경우에는 왕비와 세자빈이 동행하였으므로 왕실 여성들이 목욕을 하는 사례가 되었다(『효종실록』 7년 7월 21일).

변천

왕 중에 정사 등으로 인해 온행을 거행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온천의 물을 운반하여 이용하였다. 영조의 경우 가려움 증세로 고생하다가 온천의 물을 길어다가 훈세(薰洗)하는 방법을 이용하였다(『영조실록』 25년 10월 29일). 영조는 온천욕으로 효과를 보았는지 숙종의 온양 행행을 추억하는 온천감회시(溫泉感懷詩)를 지었다(『영조실록』 25년 11월 3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온궁일기(溫宮日記)』
  • 『온행등록(溫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한국학문헌연구소 편,『읍지(충청도―온양군읍지)』, 아세아문화사, 1984.
  •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이숭녕, 「世宗의 轉地療養에 대하여―特히 溫泉과 冷泉의 療養을 中心으로 하여―」, 『어문연구』3권 제1·2호―一石 李熙昇先生 八旬紀念特大號, 1975.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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