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위(溫下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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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압록강 중상류 지역에 거주한 여진 부족이자 위소의 명칭.

개설

온하위는 원래 함경도 경흥(慶興) 일대에 거주하던 골간올적합(骨幹兀狄哈)의 일파로 성종 연간에 압록강 중상류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조선에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침입 소식을 미리 알려주기도 하고, 건주여진 등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인을 쇄환하며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였다. 후일 누르하치([奴兒哈赤, 老乙加赤])에게 편입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온하위는 함경도 경흥 지역에 거주한 골간올적합의 일파인 김유리개(金劉里介) 등이 압록강 중상류로 이주하면서 세운 위소(衛所)이다. 골간올적합은 1407년 1월에 그 추장이었던 토성합(土成哈)이 명에 내조한 뒤, 영락제(永樂帝)로부터 희락온하위(喜樂溫河衛)를 개설받았다. 그 뒤로 『명실록』 등 명 측 사료에는 골간올적합을 희락온하위로 기재하였다. 즉, 온하위는 바로 희락온하위에서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1483년 5월에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이극균은 경흥성 아래에 살던 김유리개가 부락 사람 40여 호(戶)를 거느리고 황성(皇城: 현 집안)의 들에 옮겨 살면서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 정성을 바치고자 한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은 논의 끝에 이를 거절하였다(『성종실록』 14년 5월 10일). 이것은 1483년경에 경흥에 살던 김유리개가 관하인을 거느리고 압록강 중류 일대로 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지만 조선으로부터 거절당하자 이들은 황성보다 북서쪽, 즉 조선에서 4군을 개척한 후 폐지하였던 여연(閭延)·무창(茂昌)의 강 내·외에 거주하였다.

변천

온하위는 압록강 중상류의 여연·무창 등지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경흥 지역에서 온 골간올적합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점차 6진의 여진인이 4~5호나 3~4호씩 모여들며 일정한 세력을 이루었다(『중종실록』 17년 3월 7일). 그렇지만 1517년 12월에 김주성가(金主成可)가 평안도절도사이장생에게 말한 내용에 의하면, 온하위의 규모는 100여 호에 불과하였다(『중종실록』 12년 12월 24일). 한편, 조선의 입장에서는 폐4군 지역에 유입되는 이들의 존재가 달갑지 않았기 때문에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온하위는 조선의 압력에 거주지를 자주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온하위는 건주여진에게 포로로 잡혀 갔던 백성뿐만 아니라, 조선을 배신하고 도망간 한세충 등을 쇄환해 왔다(『연산군일기』 11년 1월 6일)(『중종실록』 4년 3월 17일). 이러한 공로로 이들은 조선으로부터 각종 물품을 지급받거나, 상경(上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또한, 온하위의 추장 김유리개와 김주성가 등은 1488년 12월 이래 끊임없이 건주여진 등의 동향을 알려왔고, 그들의 침입 소식도 보고하였다(『성종실록』 19년 12월 5일)(『성종실록』 22년 5월 25일). 따라서 기록상으로 성종대에 온하위가 조선에 1회만 내조한 것으로 기재되었지만, 기록과 상관없이 여러 차례 왔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김유리합은 1492년 12월 17일과 이듬해 1월 15일에 중추(中樞), 김주성가는 1493년 1월 15일과 3월 21일에 호군(護軍)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것은 이들이 조선에 내조하여 관직을 받은 사실을 보여 준다. 이처럼 온하위는 조선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흥기하면서 이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결국, 1591년 1월에 누르하치가 군사를 보내 온하위인 압록강로(鴨綠江路)를 차지하며 건주여진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명실록(明實錄)』
  • 『만주실록(滿洲實錄)』
  • 『청실록(淸實錄)』
  •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
  • 『정론(政論)』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孫進己 外, 『女眞史』, 吉林文化出版社, 1987.
  • 三田村泰助, 「朝鮮側史料より見た初の疆域」, 『朝鮮學報』 21·22, 1961.
  • 河內良弘, 「溫河衛考」, 『朝鮮學報』 37·38,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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