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정신(溫井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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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온천에 행행하는 온행(溫幸)을 할 때 해당 지역에 가기 전에 온천에서 지내던 제사의 주 대상.

개설

조선 건국 때부터 왕과 그 가족은 휴식을 위한 목욕과 질병 치료를 위해 자주 온천에 행행하였다. 온천 행행에서는 온천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명산대천의 자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동시에 온천의 신인 온정신(溫井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것을 온정제(溫井祭)라고 하였다. 온정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온천에서 의료 효험을 얻기 위한 샤머니즘적 신앙 때문이었다. 온정신에 대한 제사는 왕실이 온천에 가는 경우에만 거행한 특수한 사례이다.

내용 및 특징

온행에 나타나는 제사는 온정제와 산천제(山川祭), 보사제(報謝祭)이다. 이 중 온정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온정제와 보사제이다. 온정신은 온천이 있는 곳에는 모두 있다고 생각해서 제사를 지냈다. 온정제는 평산과 온양의 온정(溫井) 즉 온천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며, 산천제는 온행 여정에 속한 각 읍의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이다. 보사제는 온천에서 목욕을 마치고 온정신에게 그 효험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제사였다. 온정신에게 지내는 제사는 조선 건국 때부터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세종대에는 온천의 관리를 주변에 거주하는 승려에게 맡겼다. 온천을 관리하던 승려는 시설의 수리를 비롯하여 병든 사람의 구호도 전적으로 담당하였다(『세종실록』 9년 9월 27일). 따라서 온정신에 대한 기도와 제사 장소의 관리도 이들이 담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세종대까지 온정신은 온천 지역민들이 숭배하는 대상으로 샤머니즘적 요소가 있었다. 다만 국가에서 온정제를 소사(小祀)로 지정한 이후부터는 정식 관원을 배치하여 진행하였다.

변천

1442년(세종 24)에는 내의(內醫)노중례(盧重禮)가 의방(醫方)을 조사한 뒤 온정신에 대한 제문(祭文)을 작성하였다. 이때 국가에서는 온정제를 국가적으로 거행하려 했으며, 그 제사를 소사로 정하면서 생축(牲祝)을 중앙정부에서 온천에 보내 주었다(『세종실록』 24년 3월 17일).

1910년(융희 4)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온양 행궁을 해체하고, 일본인이 온천을 관리하면서 온정신에 대한 제사도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온궁사실(溫宮事實)』
  • 『온행등록(溫幸謄錄)』
  • 한국학문헌연구소 편,『읍지(충청도―온양군읍지)』, 아세아문화사, 1984.
  • 이숭녕, 「世宗의 轉地療養에 대하여―特히 溫泉과 冷泉의 療養을 中心으로 하여―」, 『어문연구』3권 제1·2호―一石 李熙昇先生 八旬紀念特大號, 1975.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온행 연구―溫幸謄錄을 중심으로」, 『장서각』9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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