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사(玉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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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평위(興平尉)원몽린(元夢麟)의 원당으로 지정된 전라도 담양의 사찰.

개설

담양 옥천사(玉泉寺)는 신라말 도선(道詵) 국사(國師)가 세운 비보사찰(裨補寺刹)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말에는 구곡각운(龜谷覺雲)이 머물며 총림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조선후기에는 효종의 딸 숙경공주(淑敬公主)의 남편인 흥평위의 원당이 되어 각종 불사를 일으켰다. 현종 때에는 흥평위의 원당으로서 지역(紙役)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이조(吏曹)에서 반대하여 원당이 혁파되었다.

내용 및 변천

담양 옥천사는 폐사되어 그 정확한 위치와 사찰에 대한 내력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옥천산(玉泉山) 아래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담양부읍지(潭陽府邑誌)』에서는 담양부에서 남쪽으로 40리(약 15.7㎞)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자료에는 폐사지로 보고되어 있다.

옥천사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는 17세기 말에 백암성총(栢庵性聰)이 5개월 동안 옥천사에 머문 후 지은 「호남담양법운산옥천사사적(湖南潭陽法雲山玉泉寺事蹟)」이다. 이 사적기를 통해 사찰에 대한 내력을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옥천사는 신라말 도선 국사가 전국에 비보사찰로 창건한 3,000개의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말에는 구곡각운이 머무르면서 총림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까지 옥천사에 관한 기록이 없어서 그 내력을 알지 못한다. 다만 옥천사 보광전(普光殿) 계단 아래에 있는 석정(石井)에서 맑은 물이 끊임없이 나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하기 때문에 옥천사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였다.

옥천사는 임진왜란 때 거의 전소되었지만 보광전만 피해를 입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에 승려 두영(杜英)이 보광전을 중수하였고, 그 후 승려 신견(信堅)이 보광전의 삼존상(三尊像)에 금칠을 하였다. 또 승려 지정(智淨)이 보광전 좌측에 명왕전(冥王殿)을 지었으며, 거사 김풍산(金豐山)이 선당(禪堂)을 지었다. 이후 명왕전 동쪽에 첨성각(瞻星閣)이 들어서고, 첨성각 동쪽에 미타전(彌陀殿)이, 그 아래쪽에 고사(庫司)를 지어 여러 불기(佛器) 등의 물품을 보관하였다. 보광전 우측에는 약사전(藥師殿)이 세워졌으며 그 아래쪽에는 승당(僧堂)이 들어섰다. 서쪽으로 관음전(觀音殿)이 세워졌고, 그 북쪽에 보명전(普明殿)이 들어섰다. 보광전 뒤쪽에는 5칸의 건물을 지어 16나한상을 그려 봉안하였다. 이 외에도 가대루(架大樓), 청풍료(淸風寮), 명월료(明月寮), 청심당(淸心堂), 보현전(普賢殿), 문수전(文殊殿) 등이 조성되었으므로 조선후기에 매우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옥천사는 흥평위원몽린의 원당이었다. 그는 1659년(효종 10) 효종의 딸 숙경공주(淑敬公主)와 혼인하여 흥평위가 되었고, 후에 흥평군에 봉해졌다. 아버지는 평안도관찰사원만리(元萬里)이며, 어머니는 이조 참판이시해(李時楷)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옥천사에서는 흥평위의 원당이라는 이유로 종이를 제작하여 관청에 납품하는 지역(紙役)을 면제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조에서 상주 대승사와 담양 옥천사의 원당을 혁파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왕이 윤허하였다(『현종실록』1년 4월 3일).

조선후기 왕실원당은 왕실이나 궁방의 복을 비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면세·면역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국가 재정의 축소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조나 호조에서는 궁방에 속해 있는 원당의 혁파를 왕에게 거듭 요청했다. 옥천사는 이러한 조정의 요구에 의해 왕실원당으로서의 기능이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백암집(栢庵集)』
  • 『여지도서(輿地圖書)』
  • 『담양부읍지(潭陽府邑誌)』
  • 문화재청, 『한국사지총람』, 불교문화재연구소, 2010.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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