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沃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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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옥천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옥천군(沃川郡)은 조선시대 충청도 청주목에 속한 군이다. 고려후기에 군으로 승격되었고 이것이 조선에서도 유지되었다. 15세기에 인구는 558호, 1,834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88명, 수호군(守護軍) 10명, 선군(船軍) 87명이었다. 토지는 4,178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1/4이었다. 1914년에 주변 군현을 병합해서 규모가 확장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옥천군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고시산군(古尸山郡)이었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관성군(管城郡)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산부(京山府)의 임내로 삼았고, 1143년(고려 인종 21)에는 현령(縣令)을 두었다. 1313년(고려 충선왕 5)에 지옥주사(知沃州事)로 승격하고, 경산부의 임내인 이산(利山)·안읍(安邑)·양산(陽山)의 3현(縣)을 옥천에 붙였다. 1413년(태종 13)에 옥천군으로 고치고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옮겼다. 이산은 신라의 소리산현(所利山縣)이었으며, 경덕왕 때 관성군의 속현이 되었다. 안읍은 신라의 아동혜현(阿冬兮縣)이었으며, 경덕왕 때 안정(安貞)으로 고쳤다. 양산은 신라의 조비천현(助比川縣)이었으며, 경덕왕 때 양산으로 고쳐서 영동군의 속현이 되었다. 이 3현은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산부의 속현이 되었다가 옥천으로 이속되었다. 삼국시대에 전략적 요충지로서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다가 전사한 관산성(管山城)이 옥천으로 추정된다. 한말에 대전이 생기기 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부호(富戶)가 많이 거주하였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4품 군수이다. 조선후기에는 음서 출신의 수령들이 파견되는 지역이었다. 진관 체제에서는 청주진관에 속하였다.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15명, 아전 27명, 지인 15명, 사령 23명, 관노 56명, 관비 50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관내에 11개 면이 있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서는 편호 5,312호, 인구는 남자 9,509명 여자 13,164명이었다. 토지는 밭 3,952결, 논 1,386결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국을 23부(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이때도 군으로 유지되며 12개 면을 관할하였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914년에 청산군(靑山郡)의 5개 면, 즉 영동군, 보은군, 영한면, 회인면과 전라북도 진산군 일부를 병합하였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옥천군지(沃川郡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