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구현(沃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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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군산시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조선 1397년(태조 6)에 옥구현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를 두어 현의 일을 겸임하게 하였다. 1403년(태종 3)에 옥구현이 관할해 오던 회미현을 폐지하여 옥구현에 편입하였다. 1423년(세종 5)에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고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1455년(세조 1)에 옥구가 전라도 옥구진(沃溝鎭)의 중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옥구가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부안진에 속했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해안 방어의 강화 차원에서 군산창(群山倉)에 조군(漕軍)·포수(砲手) 304명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옥구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고려가 옥구현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부군에 소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397년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를 두어 현의 일을 겸임하게 하였다. 1409년(태종 9)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그에 앞서 1403년에 회미현이 폐지되어 옥구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이로써 그곳 주민들이 토호(土豪)나 향리(鄕吏)의 사적 지배에서 벗어나 점차 공민화(公民化)되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397년에 병마사가 현사(縣事)를 겸직하던 것을 1423년에 첨절제사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는 전라도의 경우 1부, 3목, 4도호부, 12군, 37현(현령 6, 현감 31)에 관원을 둔다고 규정되었다. 37개 현 가운데 하나가 옥구현이다. 『대전회통』에서는 그것이 1부, 4목, 7도호부, 13군, 31현(현령 5, 현감 26)으로 변경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옥구현에 종6품 현감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옥구현감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1447년(세종 29)에 연변(沿邊)의 수령을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고, 긴요(緊要)한 정도에 따라 무관 임명 때도 차등을 두게 하였다. 옥구를 비롯하여 진(鎭)이 설치된 순천·부안·무장·흥양과 상긴(上緊)으로 분류된 진도에는 무과(武科)나 무재록(武才錄)에 올라 있는 자로 임명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4일).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전라도수군동첨절제사(全羅道水軍同僉節制使) 6원 가운데 종4품인 군산포첨사(群山浦僉使)를 옥구현에 두었다. 그것을 1700년(숙종 26)에 만호로 승격시켰으나, 1890년(고종 27)에 폐지되었다.

변천

1397년에 전라도에 옥구를 비롯하여 흥덕·목포·조양에 4개 진(鎭)을 설치하고 각 진에 첨절제사를 두었다(『태조실록』 6년 5월 21일). 이때 병마사를 두고 현의 일을 겸임하게 하였다. 1408년(태종 8)에 옥구수영을 폐지하였다. 그에 앞서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옥구현에 설치된 수영을 무안현의 대굴포로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 옥구수영이 해로의 중앙이 아니므로 해로의 중앙에 위치한 무안으로 옮기는 것이 왜적을 막기에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었다(『태종실록』 8년 12월 24일). 1423년에는 병마사를 낮추어 첨절제사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옥구현을 전라도 옥구진의 중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옥구현은 부안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옥구가 속한 부안진은 충좌위의 중부(中部)인 전주진관으로 편입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여산에 전라후영(全羅後營)이 설치되었다. 후영(後營)의 속읍은 옥구를 비롯하여 여산·익산·고산·금산·진산·용안·함열·임피·용담 10곳이며,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4초(哨), 속오(束伍) 34초, 표하군(標下軍) 317명, 당보군(塘報軍) 117명, 수솔군(隨率軍) 629명으로 되어 있다.

1871년에 삼군부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砲軍)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군산창에 조군·포수 304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옥구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북도는 수부(首府)를 전주에 두었으며, 옥구군을 비롯한 26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군산시사』, 군산시사편찬위원회, 2000.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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