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경(吳長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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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의 회군(淮軍) 장령(將領).

개설

오장경은 안휘(安徽) 여강(廬江)에서 출생하였다. 태평천국군이 여강을 점령하자 단련(團練)을 이끌고 공격하였다. 오장경은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 내에 경자영(慶字營)을 건립하였으며, 이후 이홍장이 회군(淮軍)을 결성하자 그를 따라 상해로 가 함께 태평천국군을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자영은 회군에 편입되었다. 1865년 다시 이홍장과 함께 염군을 진압하였다. 1880년 절강제독(浙江提督), 광동수사제독(廣東水師提督)으로 승진하였으나 산동성 등주(登州)에 그대로 주둔하여 해방(海防)을 관리하였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자 친경군 3,000명을 이끌고 출병하여 대원군을 납치하고 군란을 진압하였다. 군란 진압 이후에도 오장경은 조선에 주둔하였으나 1884년 4월 청불전쟁이 발발하자 친경군 1,500명을 이끌고 귀국한 후 곧 병사하였다.

활동 사항

오장경의 부친 오정향(吳廷香)은 우공생(優貢生)이었으나 입사(入仕)하지 못하였다. 1853년 태평천국군이 여강 현성(縣城)을 점령하자 안휘순무(安徽巡撫)였던 복제(福濟)가 부친 오정향에게 단련을 이끌고 여강을 수복하게 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이후 복제는 오장경에게 여강의 단련을 이끌고 관병을 따라 여강의 태평천국군을 공략하게 하였다.

1861년 증국번의 상군이 안경을 함락하자 오장경의 부대 500명이 상군 내에서 경자영을 건립하였다. 이후 오장경은 경자영을 이끌고 이홍장의 회군과 함께 상해(上海)에서 태평천국군과 전투하였으며, 이후 경자영은 이홍장의 회군에 편입되었다. 태평천국군이 진압된 후 오장경은 다시 1865년 증국번의 명으로 염군 진압에 나섰다.

1880년 오장경은 절강제독에 임명되었다. 프랑스와 청국 간의 갈등으로 화북 일대 해안을 방어하는 문제가 발생하자 산동 등주에서 해방을 관리하였다. 1880년 10월에는 광동수사제독(廣東水師提督)으로 임명되었으나 등주에 그대로 주둔하였다. 오장경이 이끌던 경자영은 1880년 두 개의 군영으로 분리되어 그가 직접 통솔한 군영은 친경군으로 불렸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군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오장경은 친경군 3,000명을 이끌고 등주를 출발하여 조선 남양(南陽: 현 화성시 남양동) 마산항으로 상륙하여 한성으로 입성하였다(『고종실록』 19년 7월 12일). 오장경은 군란의 배후로 대원군을 지목하고 마건충(馬建忠)·정여창(丁汝昌)과 함께 그를 천진(天津)으로 납치해 갔다(『고종실록』 19년 7월 13일). 오장경은 군란을 진압한 이후에도 그대로 조선에 주둔하였다. 오장경은 조선에 주둔하는 동안 조선 내 친청파들을 앞세워 조선의 내정에 깊이 관여하였고 청국 상인들이 조선에 활발히 진출하여 경제적 이익과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고종실록』 19년 11월 18일)(『고종실록』 20년 4월 1일).

1884년 4월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이홍장은 오장경에게 경군 6영 중 3영 1,500명을 이끌고 귀국하여 요동 금주(金州)에 주둔할 것을 명하였다(『고종실록』 21년 4월 30일)(『고종실록』 21년 5월 3일). 이에 오장경은 군대를 이끌고 귀국하여 금주에 주둔하였으나 1884년 7월 13일 병사하였다(『고종실록』21년 6월 10일).

오장경의 사후 고종은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건립하도록 하였고, 1885년 4월에 정무사(靖武祠)라는 오장경 사당이 준공되었다(『고종실록』 21년 6월 17일)(『고종실록』 29년 10월 25일).

묘소

중국 안휘 여강현 니하진(泥河鎭) 사강촌(沙崗村) 오가산(吳家山)

상훈 및 추모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 靖武祠)

참고문헌

  • 임경석 등 공편, 『한국근대외교사전』,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2.
  • 박현규, 「서울 오무장공사의 역사와 현황 고찰」, 『중국사연구』 7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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