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삼계(吳三桂)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청의 입관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명군 장수로, 상가희·경중명과 함께 삼번의 하나로 비정되는 인물.

개설

오삼계는 본디 명의 총병(總兵)으로 산해관(山海關)에서 청군의 공세를 방비하던 중 이자성(李自成)의 농민반란군이 북경을 함락하자 청에 투항한 뒤 이자성 세력을 공격하였다. 이후 청의 중국 공략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곤명(昆明)에 번부를 개설하고 삼번을 구성하였으나, 강희제의 번부 권한 축소 시도에 반발하여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가 도중에 병사하였다.

가계

오삼계는 금주총병(錦州總兵)오양(吳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조씨(祖氏)로 조대수(祖大壽)가 그의 외삼촌이었다. 오삼계의 부모와 동생 오삼보(吳三輔)는 이자성의 북경 함락 이후 피살되었다.

활동 사항

산해관에서 청군의 공격을 방어하던 오삼계는 1644년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이 북경을 위협하자 숭정제(崇禎帝)에게 구원하라는 명을 받고 평서백(平西伯)에 봉해졌다. 그러나 북경이 함락되고 부친도 포로로 잡히자, 그는 청군의 지휘관 도르곤([多爾袞], dorgon)과 연합하여 북경을 탈환하였다. 이후 그는 청의 입관(入關)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평서왕([平西王], wargi be necihiyere wang)에 책봉되었다.

오삼계는 홍광제(弘光帝)로 즉위한 복왕(福王)이 하사한 계국공(薊國公) 칭호와 50,000냥의 하사은 등을 거절하고, 청조의 중국 본토 공략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그의 활동은 조선에서도 주목의 대상이었는데, 조선에서는 주로 서평왕(西平王)으로 불렸다(『효종실록』 4년 11월 30일)(『현종실록』 10년 10월 20일).

1661년 미얀마로 도망친 영력제(永曆帝)를 죽여 남명 세력을 평정한 오삼계는 곤명을 중심으로 번부를 세워 일대의 행정과 치안을 관장하였다. 그는 광산 채굴·소금 전매·티베트 및 동남아시아와의 무역 등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한인으로 구성된 녹기군(綠旗軍) 등 10만(100,000) 규모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1662년에 이르면 그는 복주(福州)의 경중명(耿仲明)의 지위를 세습한 그의 아들 경계무(耿繼茂)와 광동(廣東)의 상가희(尙可喜)와 함께 삼번(三藩)이라 불리었다.

이에 삼번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강희제에 의하여 오삼계는 1666년 서남 지방의 관리 파견 권한 박탈, 1667년 운남·귀주 일대 정무 권한 박탈 등의 처분을 받았다. 이렇게 되자 그는 1673년 상가희의 왕작 세습 문제를 빌미로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상가희의 맏아들 상지신(尙之信)과 경중명의 손자 경정충(耿精忠) 등도 가담하였다. 이후 오삼계는 1678년 형양(衡陽)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라 하였으나 5개월 뒤 병사하였다. 이 시기 조선은 삼번의 난을 주시하고 있었으나, 오삼계가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점차 명조의 회복이나 청조 격퇴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숙종실록』 2년 3월 6일).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이블린 S. 로스키, 구범진 역, 『최후의 황제들』, 까치, 2010.
  • 최동권 외, 『만주 팔기 증수의 일기』, 박문사, 2012.
  •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양휘웅 역, 『만주족의 역사』, 돌베개, 201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