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五島)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일본구주 장기현(長崎縣)에 속한 열도의 명칭. 오도열도(五島列島)의 약칭.

개설

오도는 구주 서북단의 장기현(長崎縣) 서쪽 해상에 위치한 열도로 복강도(福江島)·구하도(久賀島)·나류도(奈留島)·약송도(若松島)·중통도(中通島) 등 5개의 큰 섬 및 그 외 약 140개의 유·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지정학적으로 오도는 고대부터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의 해상교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곳이며, 왜구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다. 조선전기에는 이 지역을 지배한 우구씨(宇久氏)가 정기적으로 조선에 사절을 파견해 왔다.

내용 및 특징

오도는 대륙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고대 일본에서 당에 파견한 견당사(遣唐使)의 기항지가 되는 등 역사상 일본의 대외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는 “중국으로 가는 일본인의 배가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고려말·조선초 왜구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로 지적되었으며, 조선에서 이곳으로의 표류민도 종종 발생하였다. 『해동제국기』에는 오도를 ‘오다도(五多島)’라고도 일컫는다고 기술하였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오다도라는 명칭은 나타나지 않았다.

중세 오도 지역은 비전국(肥前國) 송포군(松浦郡) 우구도(宇久島)를 본거지로 하였던 우구씨(宇久氏)의 영역 하에 있었지만, 우구씨가 오도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된 것은 14세기말 이후부터였다. 1383년 우구각(宇久覺)의 대에 오도 남부 최대의 섬인 복강도(福江島)로 이주하였고 그 아들인 이두수(伊豆守) 승(勝)이 심강(深江)을 본거지로 삼고 이후 점차 오도 전역을 지배해 갔다. 우구씨가 조선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1410년(태종 10)부터이지만(『태종실록』 10년 6월 30일), 오도의 지배권자를 의미하는 ‘오도우구수(五島宇久守)’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453년(단종 1) ‘오도우구수 원승(源勝, 우구씨 13대 당주로 이두수 승의 4대손에 해당)’부터였다(『단종실록』 1년 8월 26일). 이후 원승(우구승)은 정기적으로 사절을 파견해 왔는데, 1455년(세조 1) 조선으로부터 도서를 받아 무역선인 세견선 2척의 파견을 허락받았고 이후 표류민 송환의 공으로 1척이 더해졌다가 1470년(성종 1) 다시 2척으로 정해졌다. 원승 명의의 사절은 1504년(연산군 10)까지 계속 파견되었는데(『연산군일기』 10년 3월 6일) 이 시기 우구씨의 당주는 15대 우구각(宇久覺)으로 우구승의 사망 이후에도 그 후계자들에 의하여 ‘원승’을 명목으로 한 사절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활동 사항

1507년 우구씨 15대 당주 각이 사망한 후 우구씨 일파인 옥지포가(玉之浦家)가 반란을 일으켰다. 옥지포가는 이 무렵 조선과의 교역 등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 주가(主家)인 우구씨를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 반란으로 우구씨의 16개 당주 위(囲)가 사망하고 우구씨는 오도에서 밀려나 평호(平戶)의 송포씨(松浦氏)에게 의탁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1504년 이후 우구씨 및 오도로부터의 사절은 단절되었다.

1521년 평호 송포씨의 원조 하에 우구씨 17대 당주인 성정(盛定)이 반격하여, 오도 지배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1540년(중종 35) 18대 순정(純定)의 명의로 표류민 송환과 관련한 사절(『중종실록』 35년 10월 11일)을 제외하고는 우구씨의 정기적 사절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무렵 중국 대륙에서는 후기왜구(後期倭寇)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후기왜구의 대표적 인물인 왕직(王直)은 1540년 오도의 심강(深江)으로 내항해 왔는데, 우구성정은 왕직을 맞아들여 통상과 복강도(福江島)에 거주하도록 허가하였다. 이후 왕직은 우구씨의 협력 하에 이곳을 주근거지로 삼고 왜구활동을 펼쳤다. 왕직은 종종 오봉(五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었는데, 오봉은 오도의 별칭이기도 하였다.

1555년(명종 10) 발생한 을묘왜변(乙卯倭變)과 관련해 『조선왕조실록』에는 오봉(五峰)과 오행산(五幸山)이 거론되고 있는데(『명종실록』 11년 4월 1일), 오봉은 왕직, 오행산은 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선조실록』 34년 5월 8일). 이후 오도의 왜구와 관련해서는 임진왜란 발발 전인 1588년 조선과 일본의 외교 교섭 과정에서 오도로 표류해 간 사화동(沙火同)이 큰 문제가 되었는데, 풍신수길은 사화동을 비롯해 조선변경을 침입하였던 오도의 왜적을 조선에 송환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3년 1월 28일).

1587년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구주정벌 시 우구씨 당주 순현(純玄)이 풍신수길에게 신종, 오도 지배권를 풍심수길에게 인정받았다. 순현은 1592년 임진왜란 출진에 앞서 오도씨(五島氏)로 성을 바꾸었으며, 임진왜란 시에는 소서행장(小西行長) 휘하에서 활동하였다(『선조실록』 29년 9월 8일).

참고문헌

  • 김보한, 「우구씨(宇久氏)의 권력 창출과 「명대(名代)」선출」, 『문명연지』 6-2, 한국문명학회, 2005.
  • 정성일, 「교류의 경로와 풍경: 일본 고토렛토[五島列島]를 중심으로」, 『도서문화 』36,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0.
  • 尾崎朝二, 『拓かれた五島史』, 長崎新聞社, 2013.
  • 杉山正明, 『海のの記憶 五島列島: 時空をこえた旅へ』, 平凡社, 2015.
  • 中島 功, 『五島編年史』, 國書刊行會, 197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