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리(吾都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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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성에 거주하였던 건주여진의 대표적 집단인 알타리부(斡朶里部)를 가리키는 명칭 중 하나.

개설

알타리(斡朶里)는 (오도리(吾道里, 烏道里)), 알도리(斡都里), 알동(斡東) 등으로도 나타나며, 명초의 여진 위소(衛所)인 알타륜위(斡朶倫衛) 역시 이와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동여진(東女眞)의 대표적 집단이며, 원대부터 오늘날의 중국 흑룡강성 의란현(依蘭縣) 일대에 거주하였다. 의란은 조선 측 자료에 이란(移闌)으로 나타나는데, 만주어로 일란(ilan)은 숫자 ‘3’을 의미하며 의란은 곧 삼성(三姓)을 지칭하였다. 조선건국 초, 이란두만(移闌豆漫)이 태조이성계(李成桂)에게 귀부하였는데, 투먼은 ‘만(萬)’을 의미하는 만주어로 이란두만은 곧 삼만호(三萬戶)를 이른다. 이들은 원대 송화강 하류에 설치된 다섯 만호부(萬戶府) 중 당시까지 남아 있던 오도리 만호[斡朶里豆漫], 후르하 만호[火兒阿豆漫], 타온 만호[托溫豆漫]를 지칭하였다(『태조실록』 4년 12월 14일). 이때 오도리족을 영도하고 있던 추장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는 이후 두만강 상류의 회령(會寧) 일대로 이주하였다. 오도리족은 이때부터 회령 지역에 거주하면서 조선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여진 종족이 되었고 번리(藩籬)로 인식되었다. 16세기말~17세기초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에 의하여 대부분 건주여진(建州女眞)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변천

오도리 혹은 알타리는 고려공양왕대부터 내조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또 조선건국 이전부터 이성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성계는 함경도 일대의 여진 부락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올량합(兀良哈)과 알타리(斡朶里) 여진인들이 앞다투어 조회하였다[『태조실록』 총서, 126번째기사]. 오도리는 조선건국 직후부터 조정에 내조(來朝)하여 토산물을 바치고 관직뿐만 아니라, 의복·쌀·베 등의 선물을 받았으며(『태조실록』 3년 12월 14일)(『태조실록』 4년 2월 7일), 1395년 윤9월에는 동맹가첩목아가 상만호(上萬戶)의 관직을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오도리족이 조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은 그들이 올적합(兀狄哈)의 공격을 피하고, 농경에 유리한 땅을 찾아 두만강 유역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오도리족은 대체로 1399년을 전후하여 두만강 유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정종실록』 1년 1월 19일). 이들이 이주한 지역은 두만강 상류의 오모호이([吾音會], omohoi)였다. 오모호이는 ‘아목하(阿木河)’ 혹은 ‘알목하(斡木河)의 전음인데, 풍산천(豐山川)의 하류에 해당하였다. 조선은 1434년에 이곳에 진(鎭)을 설치하고 풍산(豊山)·원산(圓山)·세곡(細谷)·유동(宥洞)·고랑기(高郞岐)·아산(阿山)·옛 부거[古富居]·부회환(釜回還) 등을 경계로 삼았는데, ‘오음회(吾音會)’의 ‘회(會)’를 취하여 회령진(會寧鎭)을 설치하였다[『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동맹가첩목아를 따라 이주한 오도리족의 주요 근거지는 세종 연간에 건설된 육진(六鎭) 가운데 회령(會寧)에 해당하였다.

오도리족은 동맹가첩목아가 1406년 명에 입조하여 건주좌위도지휘사(建州左衛都指揮使)의 직함을 받게 되면서 조선과의 갈등이 발생하였고, 조선과 명의 압력 사이에서 여러 차례 거주지를 이동하기도 하였다. 동맹가첩목아의 오도리 건주좌위(建州左衛)는 봉주(鳳州)의 건주위(建州衛, 建州本衛)와 합류하였다가 이후에 다시 회령으로 돌아왔다. 오도리는 규모가 계속해서 확대되었는데, 1433년 동맹가첩목아가 올적합에 의하여 피살되면서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후 오도리족의 건주좌위는 동맹가첩목아의 동생인 판차([凡察], fanca)와 아들인 충샨([充善], cungšan)의 주도권 다툼으로 인하여 분열되어 건주좌위와 우위(右衛)로 정립하게 되며 이로써 건주위와 함께 건주삼위(建州三衛)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주한 이후에도 오도리족의 일부는 계속해서 두만강의 회령 지방에 거주하였으며, 조선의 번리 혹은 번호(藩胡)로 이해되었다. 조선은 오도리족을 번리로 인식하고, 내지의 올적합이 공격할 경우 이들을 보호하거나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경우, 물자를 내어 구제하기도 하였다.

16세기 말 오늘날 중국 요녕성 신빈현(新賓縣)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한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는 자신을 동맹가첩목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1598년 전후로 두만강 일대로 진출하였는데, 이때 조선과 적지 않은 갈등이 예상되었다. 누르하치는 회령 일대의 번호들을 자신의 관하로 주장하였고, 조선은 그들이 건주여진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함으로써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누르하치는 1600년 회령 일대의 번호를 병합시키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고, 회령의 속진인 보을하진(甫乙下鎭)의 첨사(僉使)구황(具滉)이 그들을 저지하기 위하여 출병하였다가 패전하고 전사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번호인 오도리족이 공격당하면 군사를 내어 보호하는 것이 옛 규례라고 주장하면서 구황이 출동하여 누르하치를 저지한 일을 정당화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3년 7월 28일). 이 사건은 누르하치에 의하여 복속되어 가는 시점까지 오도리족이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참고문헌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김구진, 『한국사(조선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 유소맹, 이훈·이선애·김선민 역,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 푸른역사, 2013.
  • 김구진, 「오음회의 알타리여진에 대한 연구」, 『사총』 17·18, 1973.
  • 和田淸, 『東亞史硏究』(滿洲編),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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