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현(禮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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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예산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예산현(禮山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홍주목에 속한 현이다. 고려 919년(고려 태조 2)에 설치되었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다. 15세기에 호수가 321호, 인구가 1,477명이었다. 토지는 3,732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3/7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18명, 진군(鎭軍) 27명, 선군(船軍) 156명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홍주부 예산군으로 승격하였고, 1896년(고종 33)에 충청남도 관할의 예산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예산현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오산현(烏山縣)이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점령한 뒤에 마진(馬津)으로 고치고, 지금의 홍성 지역인 지심주(支潯州)의 영현으로 삼았다. 통일신라시대 686년(신라 신문왕 6)에 고산현(孤山縣)으로 고쳤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지역인 임성군(任城郡)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 919년(고려 태조 2)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천안부의 임내로 두었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하다가, 1413년(태종 13)에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음서 출신자로 수령을 파견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18세기 통계에 의하면 관아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0명, 아전 20명, 지인 12명, 사령 15명, 관노 11명, 관비 7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조선후기에도 행정단위에는 변함이 없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따르면 면은 9개로 구성되었다. 편호(編戶) 2,809호, 인구 9,145명으로 남자 4,478명, 여자 4,667명이었다. 토지는 밭 1,912결 84부 7속, 논 1,192결 72부 6속이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국을 23부(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홍주부 예산군으로 승격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충청남도 예산군이 되었다. 1914년의 군현 통폐합으로 대흥군과 덕산군을 흡수하여 예산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