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군왕(豫郡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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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조누르하치의 열다섯 번째 아들인 도도([多鐸], dodo)의 봉작 명칭.

개설

도도는 후금(後金) 건국 이후에 본격적인 활동을 한 인물로 1636년 예친왕(豫親王)으로 봉해졌다. 도도는 병자호란 때 전봉군(前鋒軍)의 수장으로서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인조를 효과적으로 고립시킬 수 있었다. 자신의 친형인 아지거[ajige, 阿濟格], 도르곤([多爾袞], dorgon)과 함께 명과 몽골과의 전쟁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청 태종이 죽자 도르곤을 도와 순치제(順治帝)의 배후에서 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나,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였다. 친형 도르곤이 사후에 처벌을 받자, 그 역시 관작이 삭탈되었으나 강희제(康熙帝)에 의하여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가계

도도는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의 열다섯번째 아들로 적자(嫡子) 중에서 가장 어렸다. 어머니는 암바 푸진([福金, 大妃], amba Fujin) 울라나라( [烏喇納喇], ula nara)씨 아바하이([阿巴亥], abahai)였다. 도도는 아지거와 도르곤의 동복동생이기도 하였다. 도도는 보르지기트([博爾濟吉特], borjigit)씨를 비롯한 정실부인 6명을 포함하여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고, 그의 작위를 이은 둘째 아들 도니([多尼], doni) 등 8명 이상의 아들과 8명 이상의 딸을 두었다. 그중 다섯번째 아들인 도르보([多爾博], dorbo)는 친형인 도르곤에게 입적시켜 예친왕의 작위를 이었다.

활동 사항

도도는 1628년 3월 청 태종홍타이지를 수행하여 돌로트부[多羅特部]를 공략한 공으로 어르커 추후르([額爾克楚呼爾], erke cuhur) 칭호를 받았고, 십왕(十王)으로 불리었다. 양백기(鑲白旗)의 수장으로 1629년과 1631년 후금이 명의 준화성(遵化城), 대릉하성(大淩河城)을 공격할 때 참가하였고, 1632년에는 몽골 차하르부를 공격할 때에도 전공을 세웠으며, 1634년 명의 선부(宣府)와 대동(大同)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도도는 이 공로로 1636년 효쇼이 어르커 친왕([和碩豫親王], hošoi erke cin wang)에 봉해지고 예부(禮部)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1636년 12월, 청의 전봉군(前鋒軍)을 거느리고 청 태종을 앞서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조선 각지에서 올라온 근왕군(勤王軍)을 수차례에 걸쳐 격파하였다. 1639년에는 내부 사정으로 강등되어 도로이 버일러[多羅貝勒]가 되었다가 금주(錦州)·송산(松山) 일대에서 벌어진 정명전(征明戰)에서의 공로로 다시 도로이 예군왕[多羅豫郡王]에 봉해졌다. 이때 조선에는 그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9년 6월 3일).

1644년 예친왕 도르곤을 수행하여 입관(入關)하였고, 도르곤의 지시에 따라 친형 아지거와 함께 이자성(李自成)의 군사를 추격하여 장안(長安)에까지 이르렀으며 결정적인 승리를 이끈 인물이었다(『인조실록』 22년 5월 23일)(『인조실록』 23년 3월 7일)(『인조실록』 23년 5월 27일). 1645년에는 양주(楊州)를 공격하면서 한인들을 학살하고 사가법(史可法)을 죽였다. 또 강남으로 내려가 남명(南明)의 복왕(福王)을 사로잡은 공로로 친왕이 되고 여기에 덕(德)이라는 칭호를 받아 호쇼이[和碩] 덕예친왕(德豫親王)이 되었다.

도도는 내부적으로는 친형인 도르곤을 도와 그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에 기여하였다(『효종실록』 2년 3월 17일). 1647년부터 도도는 지르갈랑([濟爾哈朗], jirgalang) 대신 보정(輔政)에 임명되어 보정숙덕예친왕(輔政叔德豫親王)으로서 도르곤과 함께 순치제를 보좌하였다. 도도는 황제의 숙부로서 권력을 누렸으나, 2년 뒤인 1649년 천연두로 요절하였다. 사후에 친형 도르곤이 역률로 처벌을 받자, 함께 시호와 관작을 삭탈당하였다가 1778년에 복권되었다.

상훈 및 추모

도도는 1649년에 사망하였을 당시 보정숙덕예친왕(輔政叔德豫親王)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도르곤이 역모에 연루되어 묘호와 시호·관작 일체를 추탈당하자, 도도 역시 1653년에 도로이 예군왕[多羅豫郡王]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 강희제는 그에게 통(通)의 시호를 내려 도로이 예통군왕[多羅豫通郡王]이 되었고, 1778년에는 건륭제에 의하여 도르곤 등과 함께 친왕으로 복권되어 호쇼이[和碩] 예통친왕(豫通親王)이 되었다. 같은 해에 태묘(太廟)에 배향되고, 성경(盛京)의 현왕사(賢王祠)에 입사되었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만주실록 역주』, 소명출판, 2014.
  •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1644~1912), Ch’eng Wen Publishing Company, 1972.
  • 杜家驥, 「『滿文老檔』 太宗朝的多鐸應爲杜度考」, 『史學集刊』, 1998年 3期.
  • 周曉光, 「論多尔衮—多鐸聯盟與順治初年政局」, 『故宮博物院院刊』, 1994年 2期.
  • 趙丰年, 「濟尔哈朗與多尔衮比較硏究」, 『黑龍江史志』, 2015年 7期.
  • 陳作榮, 「論多尔衮在建立淸政勸過程中政策的两重性」, 『東北師大學報』, 1983年 2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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