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휘전(永徽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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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의 첫 번째 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단의왕후처럼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다가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영휘전은 경종의 첫 번째 비 단의왕후의 혼전이다. 단의왕후는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이다. 세자빈이었던 단의빈(端懿嬪)이 1718년(숙종 44)에 졸서하여 신주를 혼궁(魂宮)에 봉안하였고 ‘단의빈 혼궁’이라 일컬었다. 1720년(경종 즉위) 경종이 즉위한 뒤 왕후로 추봉하자 혼궁을 혼전으로 격상하면서 비로소 ‘영휘전’이라는 혼전명을 붙였다. 1724년(경종 4) 경종이 승하하고 그의 혼전은 다른 곳에 마련하였다. 경종의 3년 상제가 끝난 후 종묘에 함께 부묘하였다.

내용 및 특징

1718년(숙종 44) 2월 7일 왕세자빈이 창덕궁 장춘헌(長春軒)에서 졸서하자 경극당(敬極堂)에 빈궁(殯宮)을 마련하였다. 3개월 뒤 4월에 양주(楊州)에 있는 숭릉(崇陵)의 청룡(靑龍) 밖 유좌묘향(酉坐卯向) 언덕에 장례를 치르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궁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숙종실록』 44년 4월 18일). 이때 조성한 혼궁은 궁호(宮號)가 없었다.

세자나 세자빈의 신주를 봉안하는 혼궁에는 따로 궁호를 정하지 않았다. 단의빈의 혼궁은 ‘단의빈 혼궁’으로 불렸다. 세자보다 먼저 졸한 내상(內喪)이었으므로 세자가 훙서할 때까지 계속 혼궁에 봉안되었다. 단의빈의 혼궁은 창경궁 안 옛 내반원(內班院)에 설치하였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빈을 단의왕후로 추봉하면서 혼전에 ‘영휘’라는 전호를 정하였다(『경종실록』 즉위년 6월 15일). 영휘전을 설치한 전각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창덕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영휘전은 단의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1726년(영조 2) 10월 12일 영조가 경종의 혼전인 경소전(敬昭殿)에서 고동가제(告動駕祭)를 거행한 다음 날인 10월 13일에 경종의 신주를 경소전에서 옮겨 태묘(太廟)에 부묘하였다. 이때 영휘전에 있던 단의왕후의 신주도 함께 부묘하였다. 따라서 영휘전은 단의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720년 6월 15일부터 경종의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726년 10월 12일까지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휘전이 마련된 위치가 분명하지 않지만 『증보문헌비고』의 기록대로 창덕궁 안에 있었다면 창덕궁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궁궐이다.

참고문헌

  • 『단의빈예장도감의궤(端懿嬪禮葬都監儀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