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당(暎花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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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당대에서 문무관들의 과거를 설행할 때 시험을 지휘하던 장소.

개설

영화당은 궁궐 후원에서 열리는 대규모 행사에서 조선왕조 내내 쓰임이 많은 집이었다. 일제 강점기까지 왕이 친림하는 행사가 이 전각에서 열렸다. 영화당의 편액은 영조의 어필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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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및 용도

창덕궁 후원, 부용지 동쪽 연못가 춘당대 너른 마당을 앞마당 삼아 ‘서좌동향(西坐東向)’한 전각이다. 영화당을 중심에 두고 전후·좌우에 연못과 물길이 있었다. 영화당은 춘당대(春塘臺)의 터 위에 세워져 군사의 훈련, 문무관의 과거시험 등 큰 규모의 행사에 쓰였다.

춘당대 마당에 열 길이나 되는 대나무 기둥을 세우고 베로 된 큰 장막을 펼쳐 차일(遮日)을 하면 주변 나무들이 그 아래로 들어갔다. 당의 섬돌에 잇대어 보계(補階)를 마루처럼 만들면 수백 명이 앉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과거시험은 물론 군사·훈신들에게 음식을 내리는 일, 대사례나 왕실 잔치의 연습 등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영조 이후부터는 명나라에 망배례하는 일과 이로 인해 왕이 머무는 집으로도 쓰였다. 주변에 연못이 많아 습한 기운이 있기 때문에 기우제를 지내거나 농사를 짓는 수전(水田)을 만들어 이곳에서 한 해의 농사를 살피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창건 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후 궁궐의 총체적 변화가 있었던 광해군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던 전각이라 추측된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이 어느 정도 예전의 모습을 회복해 갈 즈음, 신료들은 백성의 곤궁함을 들어 새로운 궁궐의 역사를 제지하였다. 광해군은 신료들의 의견을 따라 환경전(歡慶殿)과 영화당 역사는 일으키지 않겠다고 전교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관(史官)의 기록은 이후 환경전, 영화당 외에도 별전과 정자 등을 두루 갖추어 궁궐을 화려하게 지었다고 따끔하게 지적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2월 13일). 이로써 추측하건대 영화당은 광해군 이전에도 있었고 광해군의 궁궐 중건 때도 복원이 된 전각이다.

영화당 복원 후 80년가량이 지나고, 1692년(숙종 18) 숙종은 영화당의 무너지고 헌 데를 보수하라고 명하였다. 춘당대는 늘 문무관의 시험이 있는 곳이고, 친히 임할 장소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숙종실록』 18년 4월 16일). 약 한 달 뒤 영화당이 완성되었다(『숙종실록』 18년 5월 12일). 이때 대제학(大提學) 권유(權愈)가 지은 상량문에는, 옛 제도를 이어받아 터를 넓히니 동우(東宇)도 새롭다며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의 웅대한 법도[偉範]와 부합한 집이라고 적혀 있다.

형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집으로 2중 기단의 높은 단 위에 놓여 있다. 4면에 툇간을 놓고 정면 전체와 측면 2칸에 이르기까지 난간을 둘렀다. 이익공집이고 부연을 단 이중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정면에서 집을 바라보고 좌측 3칸은 대청마루, 우측 2칸은 방으로 되어 있는데 방의 전·후 툇간은 툇마루를 놓아 대청마루와 연결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82년(정조 2) 11월 『국조보감(國朝寶鑑)』이 완성되었다. 세조 때부터 『보감』을 편찬하였지만, 중간에 빠진 열두 조정의 보감을 모두 편찬하여 이때에 68권이 완성되었다. 이때 정조가 직접 『국조보감』을 받아 들었던 상서로운 장소가 바로 영화당이다. 이렇듯 영화당은 상서로운 왕실 의례가 설행되고 말달리고 활을 쏘며 국가의 인재를 구하던 역동적 장소였다. 순종시기에 이르러서는 러시아의 곡마희(曲馬戱)를 관람하거나 반딧불 구경을 하는 장소로 변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궁궐지(宮闕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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