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혜서(永惠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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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연산군 때 자식 없이 사망한 궁중에서 생활하던 기생의 제사를 담당하던 관서.

개설

영혜실(永惠室)이라고도 하였다. 영혜서는 1505년(연산군 11) 기생 월하매(月下梅)의 사망을 계기로 설치된 관서로, 연산군이 전국에서 모아 궁중에서 생활하던 기생의 사망 이후 이들의 제사를 주관하였다. 중종반정 직후인 1506년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영혜서는 1505년(연산군 11) 9월 원주의 기생 월하매가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설치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월하매가 사망하자 죽음을 애도하여 여완(麗婉)이라는 칭호를 주고 봉상시에 명령하여 제전(祭奠)을 베풀고 지제교에서 제문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영혜서를 설치해 그녀뿐 아니라 자식이 없이 사망한 궁인들의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궁인은 일반적인 궁중 나인이기보다는 연산군이 전국에서 모아 궁중에서 생활하던 기생들이었다.

조직 및 역할

관원으로는 제조와 낭청을 두었으며, 초하루나 보름 및 명절에는 따로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를 차출하여 제사를 주관하였다. 영혜서는 제사를 위해 예조(禮曹)와 선공감이 주관하여 빈 땅에 행랑을 짓고 사망한 궁인들의 신주를 안치하여 제사하였다. 제사의 비용은 각 고을에 나누어 정해서 징수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9월 21일).

제사 때 궁인의 위차(位次)에 대해서는 생전에 작호(爵號)가 있던 궁인을 한 줄, 생전에 작호는 있었으나 소인(昭人)이나 한하(閑娥) 등과 같이 허작(虛爵)을 받은 궁인을 한 줄, 죽은 후에 추증한 궁인을 한 줄로 해서 각각 위차를 정하고, 정해진 위차에 따라 차등 있게 제사의 격식을 정하였다. 그리고 삭망(朔望) 때뿐 아니라 명절이나 4계절 대제(大祭) 때에도 헌관을 보내 제사 지내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10월 23일).

변천

처음에는 빈 땅이나 재상의 집을 가려서 영혜서가 주관하여 제사를 지내는 행랑을 짓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9월 21일). 같은 해 10월에는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尹氏)의 사당인 효사묘(孝思廟) 근처에 행랑을 짓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10월 15일). 중종반정 직후인 1506년(중종 1) 9월에 함께 설치되었던 광혜서나 추혜서 등과 함께 폐지되었다(『중종실록』 1년 9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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