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부(永平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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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신단의 사행로 중 한 곳이었던 명의 북직예(北直隸) 지방의 행정구역.

개설

영평부(永平府)가 조선에서 유명하였던 이유는 사행로 중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사신단은 의주에서 요양, 산해관을 거쳐 북경으로 갔다. 이때 산해관에서 북경으로 갈 때 지나간 장소 중에 한 곳이 영평부였다.

1421년(세종 3) 명이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조선의 사행은 주로 해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전의 수도였던 남경으로 오고 갈 때에는 조난 등의 사고만 제외한다면 육로보다 편리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명의 북경 천도가 시행되고 난 다음부터는 요동 지역을 통해서 이동하는 육로가 기본 사행로가 되었다.

조선의 사행단은 요양(遼陽)으로부터 안산(鞍山)-해주(海州)-우가장(牛家莊)-사령(沙嶺)-고평(高平)-반산(盤山)-광녕(廣寧)-여양(閭陽)-십삼산(十三山)-소릉하(小凌河)-행산(杏山)-연산(連山)-조장(曹莊)-동관(東關)-사하(沙河)-고령(高嶺)을 거쳐 산해관에 이르렀다. 산해관부터는 심하역(深河驛)-무녕현(撫寧縣)-영평부(永平府)-칠가령역(七家領驛)-풍윤역(豊潤驛)-옥전현(玉田縣)-소주(蘇州)-삼하현(三河縣)-통주(通州)를 지나서 북경에 도착하였다.

조선의 사행단은 영평부를 지나면서 그곳에 있던 관리들을 통하여 주변 지역의 정세 등을 파악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의 주문사(奏聞使)매우(梅佑)가 영평부에서 알고자 했던 정보들은 모두 여진 세력과 몽골 세력의 동정에 관한 것이었다(『세조실록』 8년 2월 11일). 조선과 명에서는 여진과 몽골 세력의 동향을 항상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행 과정에서 관련된 정보를 교환하고자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 『전요지(全遼志)』
  • 『요동지(遼東志)』
  • 『명사고(明史稿)』
  • 『명사(明史)』
  • 『명통감(明通鑑)』
  • 남의현, 『명대요동지배정책연구』, 강원대학교 출판부, 2008.
  • 김일환, 「연행록에 나타난 ‘구혈대’의 의미 연구」, 『한국문학연구』 43,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12.
  • 김태준, 「중국내 연행 노정고」, 『연행록연구총서』,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 학술총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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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인범, 「최부 『표해록』 연구-최부가 묘사한 중국의 강북과 요동-」, 『국사관논총』 102, 국사편찬위원회, 2003.
  • 이승수, 「연행로 중 ‘요양-안산-광녕 구간’에 대한 인문지리학적 검토」, 『한국한문학연구』 47,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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