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파부지변(寧波府之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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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3년 일본 유력 세력의 사신단이 무역 문제를 둘러싼 이권 관계 때문에 명의 영파 지역에서 일으켰던 폭동.

개설

명의 태조(太祖)주원장(朱元璋)은 건국 초기인 1371년(명 홍무 4)부터 중국의 모든 해안에서 해상활동을 금지하는 해금령(海禁令)을 선포했다. 주원장의 조치에 따라 명에서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실시했다. 당시 명에서의 해상활동은 전면 금지되었기 때문에 외국과의 교류는 조공책봉체제(朝貢冊封體制) 안에서만 실행될 수 있었다.

명은 일본에 10년에 한 번만 조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규정을 그대로 지킨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일본 입장에서는 무역 횟수가 충분하지 못했다. 더욱이 일본이 명에 사행(使行)을 파견하여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입국확인서 격인 ‘감합(勘合)’이 반드시 필요했다. 즉, 일본이 명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선박에 반드시 ‘감합부(勘合符)’라는 일종의 증명서를 가지고 있어야만 자격을 인정받았다.

감합은 일본을 대표하는 단 하나의 세력에게만 주어졌다. 1464년(명 천순 8) 일본 내에서 ‘응인(應仁)의 난’이 발생한 이후 막부(幕府) 권력이 크게 쇠퇴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세력이 조공무역에 참여하고자 했기 때문에 무역권을 특정 세력이 독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명의 지나친 해금정책과 일본의 정치상황 변화로 인해 감합을 획득하기 위한 쟁탈전이 격화되었다. 영파의 난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발생했다.

경과

1523년(명 가정 2) 일본의 유력 대명(大名) 대내씨(大內氏) 세력은 단독으로 조공선(朝貢船)을 명에 보냈다. 한편 대내씨 세력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던 세천씨(細川氏) 세력은 효력이 이미 정지한 홍치감합(弘治勘合)을 구해서 별도의 조공선을 명으로 보냈다.

세천씨 세력은 효력이 없는 감합을 소지했기에 조공무역을 수행할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중국 영파 지역의 시박사(市舶司) 관료에게 뇌물을 주어 정식 감합을 소지한 대내씨보다 먼저 무역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정식 감합을 가지고서도 무역의 권한을 인정받지 못했던 대내씨 사행단은 크게 분노했다. 결국 이들은 세천씨 사행단의 정사(正使) 등을 죽이고 영파에서 불을 지르는 등 대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 조공무역의 이권을 둘러싸고 일본의 세력들이 벌인 경쟁이 영파의 난을 초래했다.

영파의 난은 이후 명의 대일외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절강시박태감(浙江市舶太監)이 폐지되었고, 일본과의 조공무역 자체가 중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명의 대외무역정책을 더욱 폐쇄적으로 고착화하는 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명은 건국 초기부터 해금으로 대표되는 폐쇄적 대외정책을 유지했다. 16세기가 되자 명 내부에서도 해금정책을 완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영파의 난 이후 명 조정에서 해금정책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어렵게 논의되었던 해금 완화와 민간 무역의 활성화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본의 희망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또한 16세기 동아시아 교역체제의 확대 분위기에도 역행하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도 영파의 난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의 위관(委官)남곤(南袞)과 금부당상(禁府堂上)이항(李沆) 등은 충청도 지역에서 사로잡았던 중국인의 처리 문제를 건의하면서 영파부 왜변을 언급하기도 했다(『중종실록』 18년 8월 2일).

명은 영파의 난 이후 일본과의 조공무역을 중단했다가, 17년 만인 1539년(명 가정 18) 제한적으로 무역을 재개했다. 그리고 대내씨 세력에게 조공무역을 독점하도록 조치했다. 그렇지만 1547년(명 가정 26)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조공무역은 끝나게 되었다. 대내씨 가문이 1551년(명 가정 30) 멸망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명사(明史)』
  • 『명실록(明實錄)』
  • 구도영, 「16세기 조선의 ‘영파의 란’ 관련자 표류인 송환 - 조·명·일의 ‘세 가지 시선’ -」, 『역사학보』224, 역사학회, 2014.
  • 민덕기, 「실정막부시대의 대명 책봉관계의 성립과 변화」, 『청대사림』6, 청주대학교사학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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