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현(永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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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영춘현(永春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충주목에 속한 현이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설치되었다. 15세기에 호수가 195호, 인구가 582명이었다. 토지는 1,198결인데, 이 가운데 논은 21결에 불과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27명, 선군(船軍) 15명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영춘군으로 승격하였다. 1914년에 단양군에 흡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영춘현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을아차현(乙阿且縣) 또는 을아조현(乙阿朝縣)이었다. 신라에서는 을아단(乙阿旦) 또는 아달성(阿達城)이라고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자춘현(子春縣)으로 고치고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지역인 내성군(柰城郡)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영춘현으로 고치고 강원도 원주(原州)의 임내로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뒤 1398년(태조 7)에 충청도에 옮기고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영춘현은 산악 지대에 위치한 작고 척박한 지역이지만 충청도에서 강원도로 가는 교통상의 요지였기 때문에 현을 설치한 것이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문과 출신과 음서 출신을 교차로 파견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18세기 통계에 의하면 관아에 좌수 1명, 별감 2원, 군관 24명, 아전 23명, 지인 19명, 사령 9명, 관노 27명, 관비 15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영춘현은 조선후기에도 행정단위의 변화가 없었다. 조선후기에 영춘현은 6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편호 1,257호, 남자 2,277명, 여자 2,426명이었다. 전성기에는 2,300여 호까지 늘었으나 1759년(영조 35)에 이 정도로 줄었으며, 900호가 10결 미만의 땅을 가진 잔호이고 역을 감당할 수 있는 호는 300호 정도였다고 한다(『영조실록』 35년 6월 11일).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밭은 475결 6부 7속, 논은 31결 21부 1속이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국을 23부(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충주부 영춘군으로 승격하였다. 1896년(고종 33)에 충청남도 회덕군이 되었다. 1902년(고종 39)의 『영춘군양안(永春郡量案)』에 의하면 민호는 2,610호, 토지는 720결 75부 9속이었다. 1914년에 군현 통폐합으로 단양군에 흡수되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영춘군양안(永春郡量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