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嶺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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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경상도의 전세와 대동미 등 세곡을 중앙으로 상납하기 위하여 실시된 조운제도.

개설

조선초기 경상도에는 남해안 김해·창원·사천 등 3곳에 삼조창(三漕倉)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1403년(태종 3) 대규모 해난사고로 인하여 경상도의 조운제는 폐지되었고(『태종실록』 3년 5월 5일), 16세기 후반까지 경상도의 세곡은 육로로 충주 경원창(慶原倉)에 수납되었다. 경원창은 이후 가흥창(可興倉)으로 변경되었다. 가흥창에 적재된 세곡은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의 감독 아래 남한강을 경유하여 호조로 상납되었다. 이에 따라 세곡의 주산지였던 진주·창원·김해·밀양 등에서는 운반비를 별도로 수취하여 낙동강 상류로 올라와 상주와 문경을 경유하여 가흥창에 수납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17세기 광해군대 들어오면서 궁궐의 영건사업으로 인하여 선운(船運)이 재개되기 시작하였고, 세곡 운송의 주체는 경강선인이었다. 특히 대동법 이후 대폭 늘어난 세곡량과 그에 따른 선가(船價)는 이들에게 치부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경강선인의 선운업이 활발해질수록 선박의 침몰사고도 자주 발생하였고, 경강상인들은 발선 기일을 넘기거나 적재량의 한도를 초과하는 등의 불법을 자행하였다. 결국 경상도의 세곡을 담당하던 경강선인의 문제를 해결하고 안정적으로 세곡을 운송하고자 1760년(영조 36)과 1765년(영조 41)에 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선과 조군을 배치하여 조운제를 정비하였다. 이렇게 완비된 경상도의 조운제는 19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8세기 전반 조정은 경강선의 비리행위와 그에 따른 선박 침몰사고를 해결하고자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1732년(영조 8) 병조판서김재로(金在魯)는 안면도를 비롯한 연해 각 읍에 산재한 풍락목(風落木)을 이용하여 지토선(地土船)을 제작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세곡을 운송하자고 제안하였다. 경상도에서는 이 의견에 따라 「조선절목(造船節目)」을 반포하고, 지토선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절목」 반포 이후에도 세곡 운송은 그리 원활하지 못하였다. 지토선을 건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박 부족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였다. 전라도의 선박은 부실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건조된 지 5년이 채 안 되어 33척 중 10석이 손실되어 23척만이 잔존하였다. 경상도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일례로 1736년(영조 12) 칠원현의 상황을 보면 새로 건조된 지토선이 파손되거나, 분실되어 버렸다. 심지어 지토선을 무단으로 매매하는 상황도 발생하였다.

경강선인이 저지른 비리행위와 침몰사고는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그 결과 1750년대에만 무려 7,000여 석의 세곡이 침몰되었다. 따라서 조정은 더 이상 경강선을 중심으로 한 세곡 운송의 체계를 고집할 수 없었다. 경상도의 세곡 운송 문제가 심각해지자 1759년(영조 35) 좌의정김상로(金尙魯)는 경상도의 세곡을 동전이나 무명으로 대납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우의정신만(申晩)도 김상로의 의견에 적극 찬성하고 나섰다. 반면 호조 판서홍봉한(洪鳳漢)은 곡식 따위를 팔아 돈을 마련하는 작전(作錢)과 본래 곡물로 납부하던 전답의 세금을 면포로 대신 바치는 작목(作木)의 편부를 경상감사에게 물어본 후 처리하자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홍봉한의 의견에 따라 영조는 우선 경상감사에게 민정을 파악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와 달리 경상감사조엄(趙曮)은 조운제(漕運制)의 실시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근래 경강선인이 충청도와 전라도의 대동을 먼저 운반하고 난 후 늦게 경상도로 내려오기 때문에 매번 발선 시기를 놓쳐 침몰하고, 그에 따른 증열미의 폐단이 심하다고 역설하면서, 조운 설치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조엄의 조운제 설치 주장에 대하여 중앙의 관료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좌의정신만은 ‘폐단을 구제할 방도를 깊이 얻었다’라면서 바로 선혜청에게 절목을 만들어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고, 행사직홍봉한과 이조 판서민백상(閔百祥) 역시 조엄이 제시한 방안이 상세하고 치밀하니 우선 시도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결국 영조가 이들의 의견을 수렴함으로써 경상도의 조운제 설치안이 채택되었다. 그 결과 1760년(영조 36) 진주와 창원에 각각 가산창(駕山倉)과 마산창(馬山倉)이 설치되었고, 영조 1765년(영조 41) 밀양에 삼랑창(三浪倉)이 추가로 설치되었다(『정조실록』 7년 4월 28일). 이로써 경상도 삼조창이 완비되었고, 이를 통하여 경상도 남해안 일대의 조운제가 전격 복구되었다.

내용

삼조창에는 대동미의 물류량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호조가 아닌 선혜청이 경상도의 조운을 관리하였다. 조창에는 도차사원과 차사원이 임명되었는데, 도차사원은 세곡 수봉을 총 관리하는 임무를, 차사원은 조선을 이끌고 세곡을 운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산창에는 창원부사와 구산첨사, 가산창에는 진주목사와 적량첨사, 삼랑창에는 밀양부사와 제포만호가 도차사원과 차사원을 각각 겸임하였다. 남해안 연읍은 각 조창에 소속되었는데 창원·김해·함안·칠원·진해·거제·웅천·의령·고성(동남면) 등 9읍, 진주 가산창에는 진주·곤양·하동·단성·남해·사천·고성(서북면) 등 7읍, 밀양 삼랑창에는 밀양·현풍·창녕·영산·양산 등 5읍이 소속되었다. 고성은 읍을 동남면과 서북면으로 나누어 가산창과 마산창에 분할 납부하였다. 그러나 거제와 고성의 동남면에서 마산창, 하동과 남해에서 가산창까지의 운송 거리는 매우 멀었다. 이러한 세곡 수납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통제영 견내량에 마산창의 속창을 설치하여 거제와 고성의 동남면의 세곡을, 남해의 노량진 인근에 가산창의 속창을 설치하고 하동과 남해의 세곡을 수납하게 하였다. 이곳에 보관된 세곡은 마산창과 가산창의 조운선이 지나갈 때 같이 적재하여 상납하도록 하였다.

조창은 『속대전(續大典)』의 규정대로 1월 30일에 개창하고, 2월 30일까지 소속 군현의 세곡을 모두 수봉한 다음 3월 25일 이내 조운선을 발선하여 5월 15일 내에 도착하게 하였다. 조창에는 조운선이 배치되었다. 당시 경상도에서 마련한 조운선은 조엄의 발언대로 총 60척이었다. 이 중 5척은 여유분으로 남겨 두고, 55척만을 3조창에 배속시켰다. 조운선은 총 55척으로 마산창·가산창·삼랑창에 각각 20척·20척·15척이 배치되었다. 조창에 소속된 조운선에는 선명(船名)을 부여하였는데, 천(天)·지(地)·현(玄)·황(黃) 등 천자문의 순서대로 지었다. 조운선이 배치됨에 따라 조군도 새롭게 차정되었다. 17세기 이래 조운선에는 사공 1명과 격군 15명 등 총 16명이 승선하고 있었으므로 이 규례에 따라 1척당 조군 16명씩 충원하였다.

삼조창에는 총 55척의 조운선이 배치되었기 때문에 조군은 총 880명이 차정되었다. 그중 사공은 반드시 바닷가에 사는 백성 중 근실한 자로, 격군은 해로를 잘 알아 운항을 잘하는 자로 뽑았다. 그리고 별도의 군적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조군의 군적은 군현의 선명별로 작성하였고, 여느 군안과 같이 성명·나이·거주지·부친 성명·얼굴 생김새·흉터 여부 등을 기록하였다. 조군을 차정하면서 이들의 생계유지를 위하여 보인(保人)도 별도로 충원하였다. 보인은 조군 1명당 2명씩 차정하였는데, 그에 따라 총 1,760명의 보인도 각 조창에 배속되었다. 아울러 조운선의 관리와 보호를 위하여 조운선 1척당 선직(船直) 2명도 선발하였다. 즉, 조운선 1척에는 조군 16명, 조보 32명, 선직 2명 등 50명씩이 배속되었다. 이에 따라 마산창과 가산창에는 조군·보인·선직이 각각 320명과 640명·40명, 삼랑창에는 240명·480명·30명 등 총 2,720명이 조운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경상도의 조운제는 양호의 조운제와는 운영 방식이 달랐다. 충청도와 전라도 조군의 경우에는 1704년(숙종 30) 납포화(納布化)가 전면 시행되면서 더 이상 조운선에 승선할 의무가 없었다. 이 조치 이후 이들은 1명당 2필의 역가를 납부하고 조군역에서 제외되었다. 이와는 달리 경상도의 조군은 조운선에 승선하여 세곡 운송에 직접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천

18세기 중엽 실시된 경상도의 조운제는 19세기 후반 이운사(利運社)가 설립되어 증기선으로 세곡을 운송하기 전까지 변화 없이 계속 유지되었다. 다만, 경상도 삼조창의 설치로 인하여 종래 조창(漕倉)의 역할을 대행하던 양산의 감동창과 진주의 장암창은 쇠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탁지지(度支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영영사례(嶺營事例)』
  • 『영남청사례(嶺南廳事例)』
  • 羅愛子, 『韓國近代海運業史硏究』, 국학자료원, 1998.
  • 崔完基, 『朝鮮後期 船運業史硏究』, 一潮閣, 1989.
  • 문광균, 「조선후기 양산 甘同倉의 설치와 변천」, 『한국문화』 6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4.
  • 문광균, 「17~18세기 경상도 세곡운송체계의 변화와 三漕倉의 설치」, 『대동문화연구』 86,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4.
  • 문광균, 「조선후기 경상도 재정운영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