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법(永定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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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년(인조 13)에 제정되어 이후 계속 시행된 조선시대의 세법.

개설

조선은 1444년(세종 26) 이후 연분9등(年分九等)의 규정에 따라 1결당 20두에서 4두까지 차등을 두어 징수하는 전세(田稅)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 규정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경작지의 변동 상황을 정밀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토지조사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는데, 실제로는 여러 이유로 토지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이 규정은 원칙대로 시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 결과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미곡 4~6두를 거두는 관행이 사회적으로 널리 퍼졌다. 정부는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서 1635년(인조 13)에 영정법을 제정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파악할 수 있는 인구와 경작지가 크게 감소하였다. 전쟁 직후인 1601년(선조 34)무렵에는 경작지가 기존의 1,500,000결 수준에서 약 300,000결로 대폭 감소하였다. 이는 곧 국가 재정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국가 운영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토지조사사업인 양전을 실시하였다. 1611년(광해군 3)의 양전 결과 경작지인 기경전(時起田)의 면적이 약 540,000결로 늘어났다. 그리고 1634년(인조 12) 삼남 지방에 실시된 갑술양전(甲戌量田) 이후 전국의 전결 수는 점차 임진왜란 전의 상태를 회복하였다.

한편 전세를 수취하는 방식도 영정법으로 바뀌었는데, 정식 명칭은 영정과율법(永定課率法)이었다. 영정법의 실시로 토지의 등급은 고정되고 전세도 일정해졌다. 이 법은 종전의 연분9등제를 폐기하고 전세 수취액을 연분9등제에서의 하지하(下之下)로 고정시켜 4두로 정액화한 것이었다.

이로 인한 전세 수입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해서 양전사업을 강화하였는데, 1653년(효종 4) 양전법이 개정되었다. 이전에 사용하던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은 폐지되고, 통일된 기준척으로 1등 전척(田尺)을 삼되, 결부의 크기를 달리하는 양척동일법(量尺同一法)이 채택되었다. 즉, 면적을 표준으로 삼아 동일 면적에서의 수확량을 계산하고, 1등전은 100부(負), 6등전을 25부로 정하여 각각의 등급을 나누었다. 즉, 토지를 측량하는 자[尺]를 통일하여 이를 기준으로 수확량을 계산한 것이었다. 기존의 방식에 비하여 양전법이 달라졌으나, 파악된 경작지의 면적이나 전세 수취액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내용

조선전기에는 토지의 비옥한 정도를 6등급으로 분류하여 전세를 징수하던 전분6등법(田分六等法)과 매해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분류하여 징수하던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전세를 부과하는 판정 기준이 복잡하고 토지의 작황을 일일이 파악하여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점이 따랐다. 그런 까닭에 15세기 말부터 풍흉에 관계없이 최저 세율에 따라 1결당 쌀 4∼6말을 고정적으로 징수하는 것이 이미 관례로 고착화되어 있었다. 영정법은 이러한 관례를 법제화하고 전세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그해의 풍흉에 관계없이 경작지의 비옥한 정도에 따라 9등급의 새로운 수세액을 정한 것이었다. 즉, 상상전(上上田) 20말, 상중전(上中田) 18말, 상하전(上下田) 16말, 중상전(中上田) 14말, 중중전 12말, 중하전 10말, 하상전(下上田) 8말, 하중전 6말, 하하전 4말을 징수하였다.

전품(田品)은 지역에 따라 최고급지를 한정하였다. 경상도는 상하전, 전라도와 충청도는 중중전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나머지 5도는 하하전의 4말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도 대부분의 경작지가 하하전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징수하는 전세는 4말로 고정되었다.

변천

영정법 제정으로 조세 부담의 불균형이 시정된 것은 아니었다. 결부법의 존속과 함께 전분법이 여전히 잔존하였고, 연분마저도 완전히 혁파되지 않았으므로 세금 징수 과정에서의 폐단은 여전하였다.

영정법은 연분9등에 따라 1결당 4~6씩 거두던 이전까지의 관행과 비교하면 전세 부담액이 다소 낮아졌으나, 이는 15세기 말 이래 전세 징수의 관례를 법제화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농민의 많은 수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전호(佃戶), 즉 병작농이어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부족한 조세 수입을 보충하기 위하여 전세 외에도 1결당 대동미 12두, 삼수미(三手米) 2두 2승, 결작(結作) 2두의 정규 부세가 덧붙여졌다. 거기에 여러 명목의 수수료·운송비·자연 소모를 메우기 위한 비용 등과 같은 잡부금이 부가되어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부담은 병작 농민에게 전가되기 마련이어서 실제 효과는 별로 없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각 도의 농지 총 결수(結數)에 재해 면적을 계산해, 삭감하고 징수할 전세의 총액을 할당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이 1760년(영조 36)에 제정된 비총법(比摠法)이었다. 비총법은 영정법에 기초해 마련된 것으로 국가의 전세 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효과가 있었다. 비총법은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조세제도가 전면적으로 개정될 때까지 시행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김옥근, 「조선후기 전세제도 연구」, 『부산산업대학논문집』 9, 부산산업대학교, 1972.
  • 박종수, 「16·17세기 田稅의 定額化 과정」, 『韓國史論』 30,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3.
  • 송명석, 「朝鮮中期 田稅收取와 永定法 도입」, 『弘益史學』 6, 홍익대학교 사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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