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위(寧遠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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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 요동 지역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한 위소 중 하나.

개설

영원위가 설치되었던 광녕(廣寧)과 산해관(山海關) 지역은 원(元)대까지는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명이 건국한 뒤 이 지역에 광녕전둔위(廣寧前屯衛)와 중둔위(中屯衛)를 설치하였다. 1428년 기존에 설치하였던 2위의 땅을 분할해서 영원위를 새로 설치하였다. 아울러 영원위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의 휘하에서 통제받도록 편제되었다.

영원위는 조선 사신들의 사행로이자 명이 여진의 침입을 방어하는 거점 중 한 곳이었다. 따라서 조선 사신 일행은 영원위를 지나면서 명의 관리들과 여진 세력의 동향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세조실록』 8년 8월 20일).

설립 경위 및 목적

명초 유기(劉基)의 건의에 따라 시행된 위소(衛所)제도는 명 군사제도의 중심이 되었다. 위소는 명의 전국에 산재해 있던 군사 요충지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해당 지역의 상황에 따라서는 천호소(千戶所)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위가 설치되었다. 1393년까지 명은 전국적으로 329개의 위와 65개의 수어천호소(守禦千戶所)를 설치하였다. 위소는 군사 작전에서 중요한 거점이 되면서, 명의 군사 체제에서 그 중요성이 보다 증가하였다.

이 중 130개의 위가 영락제의 몽골 정벌이 시작되기 이전에 설치되었다. 이는 여진위소의 설치 목적 중 중요한 한 가지가 몽골 정벌을 대비해서 배후 세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와 연관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결국 명에서 의욕적으로 위소를 설치하였던 것은 여진 세력은 물론 몽골 세력에 대한 방어와 관련된 군사적 목적이 중요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영원위 역시 북방 몽골 세력의 침입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설치되었다.

변천

청(淸)은 1663년 영원위의 동쪽에 있던 탑산소(塔山所)의 땅과 서쪽에 있던 전둔위의 땅을 모두 합쳐 영원주(寧遠州)를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 『명사고(明史稿)』
  • 『명사(明史)』
  • 『명성조실록(明成祖實錄)』
  • 『명통감(明通鑑)』
  • 『요동지(遼東志)』
  • 『전요지(全遼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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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준, 「중국내 연행 노정고」, 『연행록연구총서』,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 학술총서, 2006.
  • 남의현, 『명대요동지배정책연구』, 강원대학교 출판부, 2008.
  • 서인범, 「최부 『표해록』 연구-최부가 묘사한 중국의 강북과 요동-」, 『국사관논총』 102, 국사편찬위원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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