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군(靈巖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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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995년(고려 성종 14)에 낭주(朗州)로 승격시키고 안남도호부(朗州安南都護府)를 두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영암군으로 강등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9년(태종 9)에 영암군이 관할해 오던 4현과 2향 4소 4부곡은 영암군에 편입하였다. 1455년(세조 1)에 영암군이 전라도 나주도(羅州道)의 중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영암군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나주진에 속했다. 1867년(고종 4)에 영암을 비롯하여 해남·함평·영광의 네 고을과 9진을 모두 진도진 관할로 고쳤다. 1873년(고종 10)에 삼군부(三軍府)가 영암군에 별포군(別砲軍) 100명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 체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영암군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고려 때 영암으로 고쳤으며, 995년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하여 낭주(朗州)로 승격시켰다. 낭주 안남도호부가 폐지되고 그것이 전주로 옮겨 감에 따라, 1018년에는 다시 낮추어서 영암군으로 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그것이 이어졌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낭주 안남도호부의 설치 시기가 996년(고려 성종 15)으로 되어 있다.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영암군이 관할해 오던 4현과 2향 4소 4부곡이 폐지되어 영암군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4현은 곤미(昆湄)·황원(黃原)·옥산(玉山)·옥천(玉泉)이며, 2향은 진남(鎭南)과 북평(北平)이다. 4소는 동백(冬栢)·마봉(馬峯)·신갈(神葛)·귀인(貴仁)이며, 4부곡은 팔마(八馬)·회의(懷義)·송지(松旨)·심정(深井)이다. 이로써 그곳 주민들이 토호(土豪)나 향리(鄕吏)의 사적 지배에서 벗어나 점차 공민화(公民化)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암군에 종4품 군수(郡守)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군수는 종4품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영암군수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군수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군수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1447년(세종 29)에 연변(沿邊)의 수령을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고, 긴요(緊要)한 정도에 따라 무관 임명 때도 차등을 두게 하였다. 중긴(中緊)으로 분류된 영암·강진·해남에는 비록 무과(武科)나 무재록(武才錄)에 오르지 못하였을지라도 이재(吏才)와 지략을 겸비한 자를 가려서 임명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4일).

변천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翼)에 분속시켰다. 영암을 비롯하여 나주·광주·남평·능성을 전라도 나주도(羅州道)의 중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에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나주도 그중 하나이다. 영암을 비롯하여 무장·고창·영광·함평·무안·영암·남평이 나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는 나주거진이 전라우영(全羅右營)으로 바뀌었다. 전라우영의 속읍은 나주·광주·능주·영암·영광·화순·남평·무안·함평·무장 10곳이며,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52초, 표하군(標下軍) 210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65명으로 되어 있다.

1867년에는 진도방어영(珍島防禦營)의 진관(鎭管)을 변경하였다. 즉 영암을 비롯하여 해남·함평·영광의 네 고을과 임자도·다경포·목포·지도·남도포·어란포·금갑도·이진·마도의 9개 진을 모두 진도진(珍島鎭) 관할로 고쳤다(『고종실록』 4년 1월 2일). 1873년에 삼군부 영암군에 별포군 10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10년 5월 26일).

1895년에 8도 체제를 폐지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영암군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영암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1906년(고종 43)에 과거 진도군의 월경지(越境地)였던 명산군(命山郡)이 이때에 비로소 정리되어 영암군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영암군지』, 영암군지편찬위원회, 1998.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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