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선사(領選使)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881년(고종 18)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서 유럽식 군기의 제조법과 군사 훈련법을 도입하기 위하여 파견한 사절단의 대표.

개설

조선 정부는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부국강병을 위하여 무비자강(武備自强)을 추진하였다. 개항과 동시에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추진한 개혁 정책을 시찰하기 위하여 수신사를 파견하는 한편, 근대적 과학기술과 군기의 제작 및 군사훈련의 학습을 위한 유학생을 청나라에 파견하고자 하였다. 당시에 국정을 담당하던 통리기무아문에서는 김윤식을 대표로 하여 청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하면서 그 대표를 영선사(領選使)라고 명명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부는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 청나라와 일본의 변모하는 정세를 판단하고 자강책 마련에 주력하였다. 자강책은 신무기 도입과 과학기술의 학습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때 청나라의 리홍장은 조선 정부가 추진하는 자강책을 지원하는 것이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으며 기존의 속방 체제를 유지하는 것임을 간파하여 적극 지지하였다. 1876년에 조선 정부는 리홍장에게 유학생 파견의 의견을 타진하였고, 1879년(고종 16)에 이르러 군사 훈련법과 군기 제조를 배우기 위한 인원의 파견에 대략 합의하게 되었다. 리홍장은 대조선의제기련병각조(代朝鮮擬製器練兵各條)와 조선국원변래학제조조련장정(朝鮮國員弁來學製造操練章程)을 만들어 유학생을 받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동시에 리홍장은 광서제에게 이 사안을 보고하여 재가를 받아서 조선 정부에 그 시행을 알렸다.

고종은 1881년 2월에 통리기무아문에서 청나라에 파견할 유학생을 인솔할 사신의 칭호와 유학생 파견을 준비하도록 명령하였다. 통리기무아문에서는 칭호를 영선사라 하고 조용호(趙龍鎬)를 임명하였다. 그런데 조용호가 죽게 되어 순천부사(順天府使)였던 김윤식(金允植)을 임명하였다. 영선사 일행은 1881년(고종 18) 초에 선발하기 시작하여 종사관(從事官)윤태준(尹泰駿), 관변(官弁) 백낙윤(白樂倫)과 서광태(徐光泰) 등을 임명하였다. 영선사행의 인원 구성은 유학생 38명을 중심으로 관원 12명, 수종(隨從) 19명 등 도합 69명이 정식 인원이며, 그 밖에 개인적으로 데려간 수종이 14명이었다. 김윤식이 인솔한 학도는 69명으로 천진(天津)에 도착하여 병장기를 만들던 천진기기국(天津機器局)의 2개국(局)에 나누어 배속될 예정이었다(『고종실록』 18년 2월 26일)(『고종실록』 18년 9월 26일). 영선사 일행은 9월 26일 서울을 출발하여 육로로 11월 17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영선사는 유학생의 학습만이 아니라 청국의 북양대신이었던 리홍장과 외교적 현안도 처리해야 했다. 1882년(고종 19) 김윤식은 천진에서 통상과, 외국과의 국교 수립을 위한 문제를 청나라와 논의하였다(『고종실록』 19년 2월 17일). 김윤식은 조미수교와 관련하여 리홍장과의 회담을 통하여 청나라 사신 정여창(丁汝昌)과 마건충(馬建忠)이 미국 사신 슈펠트와 함께 배를 타고 조선에 도착할 것을 알고서 보고하였다(『고종실록』 19년 3월 15일).

변천

영선사가 청나라에서 수행한 임무 중에서 외교적인 것은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었으나, 주요 현안이었던 유학생들의 학습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유학생들은 천진기기국에 배속되어 군기 지식, 자연과학, 외국어 등을 학습하여 근대적 문물 습득에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군사적 지식 습득을 할 수 있는 수사학당(水師學堂)과 수뢰학당(水雷學堂)에는 소수만 입당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유학생의 반수가 신병과 개인 사정으로 귀국했으므로 성공적인 학습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영선사 일행에게 대두된 가장 큰 문제는 재정이 부족한 것이었다. 조선정부가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유학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고 지방의 비용을 임시로 차용한 상황에서 영선사 일행을 보냈으므로 장기적인 체류를 보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습의 성과가 없거나 병졸을 대동하지 못한 군관, 병이 있는 자는 귀국 조처하였다(『고종실록』 19년 2월 17일). 특히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모든 학습은 중단되었고 유학생들은 귀국길에 올랐다. 1882년 11월에 김윤식은 귀국하면서 학도(學徒)들과 공장(工匠)들을 대부분 데리고 왔으며 종사관(從事官)김정균(金定均)과 통사(通詞) 1명만 남겨서 관리하게 하였다(『고종실록』 19년 11월 5일). 결국 유학생의 학습 기간은 6개월 전후 정도였으므로 신기술의 도입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렇지만 유학생이 귀국하면서 가져온 서구식 기계와 과학기술 서적으로 인하여 국내의 근대화 정책이 탄력을 받았다. 1883년(고종 20)에 국내 최초의 근대 병기 공장인 기기창과 번사창(飜沙廠)을 설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1883년에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는 영선사가 천진에서 활동하였던 것을 참작하여 외교관을 천진에 주재시켰다(『고종실록』 20년 10월 6일).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임경석·김영수·이항준, 『한국근대외교사전』, 성균관대학교, 2012.
  • 권석봉, 「영선사행(領選使行)에 대한 일고찰-군계학조사(軍械學造事)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17·18합집 , 196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