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군(靈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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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광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때 영광군으로 고쳐서 조선으로 이어졌다. 1455년(세조 1)에 전라도 무장진(茂長鎭)의 우익을 맡았고, 1457년(세조 3)에는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나주진에 속했다. 1532년(중종 27)·1629년(인조 7)·1755년(영조 31)에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는데, 1543년(중종 38)·1638년(인조 16)·1764년(영조 40)에 각각 복구되었다. 1867년(고종 4)에 영광을 비롯한 네 고을과 9개의 진을 모두 진도진(珍島鎭) 관할로 고쳤다. 1873년(고종 10)에는 영광군에 화포군과 별포사(別砲士) 100명을 설치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8도 체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영광군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940년(고려 태조 23)에 영광군으로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나주목에 소속되어 지사군(知事郡)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이것이 이어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영광군이 관할해 오던 3현과 2향 3부곡이 폐지되어 영광군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3현은 삼계(森溪)·임치(臨淄)·육창(六昌)이고, 2향은 대안(大安)과 망운(望雲)이며, 3부곡은 진량(陳良)·홍농(弘農)·공아(貢牙)이다. 이로써 그곳 주민들이 토호(土豪)나 향리(鄕吏)의 사적 지배에서 벗어나 점차 공민화(公民化)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광군에 종4품 군수(郡守)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군수는 종4품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그리고 영광군수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군수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군수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영광군에 종4품인 법성첨사(法聖僉使) 1원을 두었다. 1708년에 만호로 승격하였으며, 나중에 종3품 첨절제사로 승격하였다. 임자도첨사(荏子島僉使) 1원도 영광군에 두었다. 1890년(고종 27)에 모두 폐지되었다.

1447년(세종 29)에 연변(沿邊)의 수령을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고, 긴요(緊要)한 정도에 따라 무관 임명 때도 차등을 두게 하였다. 영광군은 하긴(下緊)으로 분류되어 비록 무과(武科)나 무재록(武才錄)에 오르지 못하였을지라도 이재(吏才)와 지략을 겸비한 자를 가려서 임명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4일). 1583년(선조 16)에는 순천을 비롯하여 장흥·순천·영광·강진·해남의 문관 수령을 무신으로 바꾸어 임용하기로 한 적이 있었다(『선조실록』 16년 2월 20일).

변천

영광군이 현으로 강등된 일이 세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1532년(중종 27)으로 1531년(중종 26)에 영광의 향리 박태근(朴太根) 등이 군수임백령(林百齡)의 명령이 엄한 것에 원한을 품고 군수의 아버지와 두 아들의 무덤을 발굴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중종실록』 26년 10월 6일). 1532년에 형조 판서박호(朴壕) 등이 영광군을 현으로 강등시켰다(『중종실록』 27년 3월 11일) (『중종실록』 27년 3월 12일). 1543년(중종 38)에 민세량(閔世良)이 전례에 따라 영광군으로 복구할 것을 아뢰었다(『중종실록』 38년 4월 20일). 두 번째는 1629년(인조 7)으로 역모 사건에 이 고을 사람 이극규(李克揆)가 연루되었기 때문이다(『인조실록』 7년 11월 20일) (『인조실록』 7년 12월 4일). 『대동지지』에 따르면 이로 말미암아 영광군이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8년(인조 16)에 복구되었다. 세 번째는 1755년으로 이 고을 사람 이주(李澍)가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영조실록』 31년 7월 10일). 영광군이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64년에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翼)에 분속시켰다. 영광을 비롯하여 함평독진(咸平獨鎭)과 진도를 전라도 무장진(茂長鎭)의 우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에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나주도 그중 하나이다. 영광을 비롯하여 무장·고창·영광·함평·무안·영암·남평이 나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는 나주거진이 전라우영(全羅右營)으로 바뀌었다. 우영(右營)의 속읍은 나주·광주·능주·영암·영광·화순·남평·무안·함평·무장 10곳이며, 우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52초, 표하군(標下軍) 210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65명으로 되어 있다.

1867년에 진도방어영(珍島防禦營)의 진관(鎭管)을 변경하여 영광은 진도진(珍島鎭) 관할로 고쳤다(『고종실록』 4년 1월 2일). 1871년(고종 8)에는 삼군부(三軍府)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법성진에 사공·곁꾼·포수 336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또 1873년에는 영광군에 화포군과 별포사 100명을 설치하였다(『고종실록』 10년 7월 1일).

1895년에 8도 체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영광군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영광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영광군지』, 영광군지개정발간편찬위원회, 1998.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