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경전(永慶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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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창경궁에 있던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장경왕후처럼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3년상이 아닌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다가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영경전은 중종의 계비(繼妃) 장경왕후의 혼전이다. 장경왕후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여필(尹汝弼)의 딸이다. 1515년(중종 10)에 장경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영경(永慶)’으로 정하고(『중종실록』 10년 3월 7일), 윤달(윤4월)을 포함하여 3개월 뒤 희릉(禧陵)에 장례를 치렀다. 15개월에 지내는 담제를 마친 뒤 중종의 혼전인 경사전(景思殿)으로 신주를 옮기기 전까지 영경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515년 3월 2일 장경왕후가 경복궁의 동궁 별전(別殿)에서 승하하였다. 시신을 봉안한 빈전(殯殿)을 어느 전각에 마련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3개월 뒤 윤4월에 희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중종실록』 10년 윤4월 4일). 이때 조성한 혼전명이 영경전이다. 영경전을 어느 전각에 마련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다.

영경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졸곡제(卒哭祭), 소상(小祥), 담제를 지낸 기록만 확인된다.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승하하자 산릉에서 장례를 치르고 신주를 봉안하기 위해 조성한 중종의 혼전인 경사전(景思殿)으로 장경왕후의 신주를 옮겨 함께 봉안하였다(『인종실록』 1년 2월 9일). 그때부터 영경전이라는 혼전명은 사라졌다.

경사전은 처음에는 창덕궁의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에 마련하였고, 중종의 졸곡이 지난 뒤 국상(國喪)을 주관하는 인종이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文政殿)으로 옮겼다. 혼전의 전각이 바뀌더라도 혼전명은 그대로 경사전이라 일컬었다.

1547년(명종 2) 1월 12일 중종과 장경왕후의 신주를 경사전에서 모셔와 태묘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영경전은 장경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515년(중종 10) 윤4월 4일부터 경사전에 봉안한 1545년(인종 1) 2월 9일까지 설치한 혼전이다. 이후 장경왕후의 신주는 1545년 2월 9일부터 1547년 1월 12일까지 경사전에 봉안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경전이 마련된 위치는 알 수 없고, 경사전으로 장경왕후의 신주를 옮겼던 전각만 언급하면 창덕궁의 선정전과 창경궁의 문정전이다. 선정전과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종묘의궤(宗廟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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