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永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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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 진(晉)나라 회제(懷帝) 대에 사용한 연호(307년~313년).

개설

중국 진나라의 회제가 사용한 연호로(307년~313년), 307년부터 313년 4월까지 6년 4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영가(永嘉) 연간 동안 중국에서는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가리켜 <영가의 난>이라고 한다.

한편 조선(朝鮮)에서는 정치 · 사회 · 문화적 변화 및 자연 재해 등의 현상이 발생하면 일반적으로 중국의 예를 참조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가 연호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등장한다.

그 가운데 『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7년(1517년) 12월 26일자는 문종(文宗)의 왕비이자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權)씨의 소릉(昭陵) 복위에 관하여 논의하면서 영가 연호를 언급한다. 현덕왕후는 24세가 되던 1441년에 단종을 낳았으나 3일 뒤에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 1450년 왕위에 오른 문종은 권씨를 현덕왕후로 추숭하고, 능호를 ‘소릉’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1452년 문종과 합장되면서 ‘현릉(顯陵)’으로 개호되었으며, 1454년 문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그런데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생하여 단종이 폐위된 후, 1456년 현덕왕후의 어머니 최아지(崔阿只)와 동생 권자신(權自愼)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복주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결과 이듬해인 1457년 아버지 권전(權專)은 추폐되어 서민이 되었고, 아들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다. 더불어 “그 어미 된 자가 왕후의 명호를 유지함은 마땅하지 않으니 추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개장하여야 한다”는 의정부의 계(啓)에 따라 현덕왕후는 폐위되었다.

이후 1471년(성종2) 남효온(南孝溫)을 시작으로 현덕왕후의 소릉 복위가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세조의 즉위 정당성과도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중종 대에 다시 소릉 복위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때 남곤(南袞) 등이 소릉 복위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진나라 무제(武帝)의 왕후가 서인으로 폐출되었으나, 영가 연간에 다시 추향되었음을 인용하면서, 영가 연호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중종실록(中宗實錄)』
  • 『진서(晉書)』
  • 이현종 편, 『동양연표(東洋年表)』, 탐구당,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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