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승(厭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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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하게 작용하는 강한 힘, 또는 기운을 누르거나 꺾기 위한 주술.

개설

인간이 부닥치는 문제들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초자연적인 방법에 의존하려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신령에게 의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원리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는 것이다. 이렇듯 신령의 힘을 빌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을 주술이라 하는데, 염승(厭勝)도 주술의 한 방법이며, 그 중에서도 인간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힘을 누르거나 꺾는 방법이다. 염승은 고대에서부터 행해졌으며, 전통시대를 통하여 인간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내용 및 특징

염승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한국에서도 고대부터 행해졌다. 신라의 황룡사 터나 백제의 미륵사 터에서 치미(鴟尾)가 발견된 점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데, 치미란 화재 방지를 위해 건물의 용마루 위에 얹어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도 염승이 널리 행해졌음은 1123년(고려 인종 1)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고려도경』에서, "고려 사람들은 귀신을 믿고 음양(陰陽)에 얽매여, 병이 들면 약은 먹지 않고 부자 사이 같은 아주 가까운 육친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오직 저주와 염승을 알 따름이다."라고 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위로는 궁중에서부터 아래로는 민간에 이르기까지 염승에 의지하는 일이 많았다. 염승의 목적은 다양하였다. 국가를 위협할 수 있는 영웅의 탄생을 막기 위해서도 염승을 했고, 죽은 자가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되면 그의 무덤에 염승을 했으며,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도 염승을 했다. 심지어 국가에서도 가뭄이 계속될 때는 북 치는 것을 금지했는데, 그것은 북소리로 말미암아 북돋아질 수 있는 양기를 누르기 위해서였다. 이런 분위기 탓에 염승과 관련되는 책이나 비방들이 유통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서는 원칙적으로 이기적 목적의 염승은 범죄로 간주하였으며, 왕실에서도 용납하지 않았다. 예컨대 세종 때는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염승을 한 세자비 김씨를 폐위했으며, 광해군 때는 인목대비가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의 능에 뼈를 파묻고 광해군의 이름을 쓴 고기 조각을 솔개나 까마귀에게 먹였다고 하여 서궁으로 축출했다. 성종의 왕비 윤씨의 경우는 다른 비빈들이 자신에게 염승했다고 모함하다가 오히려 폐비를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 염승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에, 조선시대를 통하여 염승은 근절되지 않고 비밀리에 계속 행해졌다.

의의

당면한 문제는 해결해야 하지만 주변 환경을 통제하는 힘에 한계가 있을 때, 인간들은 초자연적 방법에 의존한다. 염승과 같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인간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전혀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胡新生, 『中國古代巫術』, 山東人民出版社,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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