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현(連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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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연산현(連山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공주목에 속한 현이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설치되었다. 15세기에 호수가 378호, 인구가 1,487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9명, 진군(鎭軍) 2명, 선군(船軍) 162명이었다. 토지는 3,836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3/7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연산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논산군에 흡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 연산현은 백제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황산군(黃山郡)으로 고쳤다. 고려가 건국한 뒤 940년에 연산군(連山郡)으로 고쳤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공주(公州)의 임내로 두었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그대로 유지하다가, 1413년(태종 13)에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음서 출신을 수령으로 임명하는 지역이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18세기 통계에 의하면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8명, 아전 20명, 지인 9명, 사령 13명, 관노 24명, 관비 23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고려 940년에 연산현이 설치된 이래 그 이름이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646년(인조 24)에 토적 유탁(柳濯) 등의 모반 때문에 은진(恩津)·이산(尼山)·연산을 합하여 한 현으로 만들고, 은산(恩山)이라 불렀다(『인조실록』 24년 5월 1일). 1655년(효종 6)에 다시 복구하였다(『효종실록』 6년 1월 3일).

조선후기에 연산현은 9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따르면 편호 2,587호, 남자 4,926명, 여자 5,121명이었다. 토지는 밭 2,903결 99부 6속, 논 2,130결 25부 3속이었다. 1895년(고종 32)의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공주부 연산군이 되었다가, 1896년(고종 33)에 충청남도 연산군으로 변경되었다. 1901년(고종 38)의 『연산군양안(連山郡量案)』에 의하면 민호는 4,290호, 토지는 2,873결 42부 6속이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산군이 폐지되는 동시에 논산군의 연산, 부적, 양촌, 벌곡, 두마의 5개 면으로 재편되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연산군양안(連山郡量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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