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복전(延福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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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경희궁에 있는 진종(眞宗)과 그의 비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반면,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었다.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연복전은 일반적인 혼전과 다른 행보를 걸었다. 진종과 효순왕후는 세자와 세자빈으로 훙서하였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이들을 왕과 왕후로 추존하였다. 추존된 뒤 종묘에 부묘하기 전까지 이들의 혼전으로 삼은 곳이 연복전이었다.

내용 및 특징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정조는 곧바로 영조의 뜻을 이어받아 영조의 맏아들이자 자신에게 백부가 되는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모시기로 하였다.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뒤 세손이 죄인의 자식으로서 대통을 이을 수 없었기에 영조가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들어가게 했고, 정조가 1776년(정조 즉위) 즉위하자 양부모인 효장세자와 현빈(賢嬪)을 진종과 효순왕후로 각각 추숭하였다.

1776년 3월 19일 추숭하는 날에 혼전의 전각명을 ‘연복(延福)’으로 정하고(『정조실록』 즉위년 3월 19일), 종묘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들의 신주를 봉안하였다. 연복전은 창경궁에 있는 효순묘(孝純廟)의 옛 혼전에 마련하였다.

1777년(정조 1) 7월 28일 존현각(尊賢閣)에 도둑이 들면서 혼전 자리에 변동이 있었다. 이틀 뒤인 7월 30일 정조는 8월에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겠으니 영조의 혼전인 효명전(孝明殿)을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으로, 진종의 신위를 경희궁의 위선당(爲善堂)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8월 3일 진시(辰時)에는 연복전을 경희궁의 위선당에 임시로 봉안하고, 미시(未時)에 휘령전(徽寧殿)을 연복전으로 옮겼으며, 8월 6일 오시(午時)에 효명전을 창경궁으로 옮긴 뒤 연복전을 당일 태령전(泰寧殿)으로 이안(移安)하기로 하였다. 1778년(정조 2)에 부묘할 날이 가까워지자 진종의 신위를 창의궁에서 경희궁으로 옮겨 봉안한다는 기사를 통해(『정조실록』 2년 4월 9일), 신주는 경희궁에서 창의궁으로 옮겼다가 다시 경희궁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1778년(정조 2) 5월 2일 영조와 정성왕후(貞聖王后)를 종묘 정전 제13실에 부묘한 뒤 진종과 효순왕후를 제14실에 각각 부묘하였다. 연복전은 정조가 즉위하여 그들의 신주를 봉안한 때부터 1778년 5월 2일까지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연복전이 있었던 경희궁은 고종대까지 존속되었다가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참고문헌

  • 『진종효순왕후추숭도감의궤(眞宗孝純王后追崇都監儀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 이현진, 「정조 초 영조의 國葬 절차와 의미」, 『泰東古典硏究』27,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