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산소(曆算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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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때 역산(曆算) 전문가를 양성하던 기관.

개설

세종대에 『칠정산내외편』 등 조선 실정에 맞는 역법(曆法)을 만드는 과정에서 역산 전문가의 양성이 필요함을 느껴 1448년(세종 30)에 만든 기관이다. 역산소에는 역산훈도(曆算訓導)와 역산학관(曆算學官) 등 13명의 인원이 있었고 산서(算書)와 역경(曆經) 공부를 연마하게 하였다. 1460년(세조 6) 이후에는 역산소가 서운관(書雲觀)의 역법 업무도 겸임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역산소는 세종대에 중국 역만 받아 쓰고 조선 실정에 맞는 역법이 없는 현실에서 역법의 발전을 위해 설립되었다. 1433년(세종 15) 세종은 신하들에게 명나라의 대통력을 연구해 역법의 원리를 완전히 소화하도록 지시했는데, 역산소는 역법에 능통한 전문 인력 양성 기관이었다. 세종은 역법 연구를 위해 역산의 책(冊)을 널리 구하여 『대명력(大明曆)』·『회회력(回回曆)』·『수시력(授時曆)』·『통궤(通軌)』와 『계몽(啓蒙)』·『양휘전집(揚輝全集)』·『첩용구장(捷用九章)』 등의 책을 얻었고 이와 관련한 질문을 던졌으나, 당시 천문과 산학을 담당한 서운관·습산국(習算局)·산학중감(算學重監)에서 한 사람도 대답한 사람이 없었다.

역법 전문가가 없다는 현실을 인식한 세종은 산법교정소(算法校正所)를 두고 문신(文臣) 3, 4인과 산학인(算學人) 등에게 명하여 먼저 산법(算法)을 익힌 뒤에야 역법을 추보(推步)하여 구하게 하였다. 당시 역법 연구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한 사람은 이순지와 김담이었다. 이들은 실제 관측을 행하고 역법의 원리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를 수행하면서 이 연구를 토대로 『칠정산내편』을 완성해냈다. 이들은 먼저 명나라의 대통력을 연구하여 그 결과로 『대통역일통궤』, 『태양통궤』, 『태음통궤』, 『교식통궤』, 『오성통궤』, 『사여전도통궤』 등을 편찬해냈다. 이 책들은 『칠정산내편』을 완성하기 위한 전초단계의 역법 이론을 망라한 것으로 세종 때의 천문학자들이 중국의 역법 지식을 완전히 소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변천

1448년(세종 30)에 세종은 조선의 역법이 후세에 전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역산소를 설치하였다(『세조실록』 9년 3월 2일). 역산소에는 선생 격인 역산훈도 3인과 학생 격인 역산학관 10인을 두고 이들이 항상 산서와 역경을 익히게 했다. 역산훈도와 역산학관들은 열흘마다 시험을 치렀고[取才] 매일매일 수업 태도를 장부에 적어 부지런한 자는 권장하고 게으른 자를 징계하여 학업을 연마하도록 했다(『세조실록』 6년 6월 16일).

1460년(세조 6)에 역산소는 역산 공부 외에도 서운관의 업무를 겸임하였다. 서운관의 역법을 맡은 관리들이 해마다 태양(太陽)·태음(太陰)·오성(五星)·사여(四餘)·현행력(見行曆)·교식(交食) 등을 추산(推算)하는데, 서운관에 결원이 생기면, 역산훈도와 역산학관 중에서 품등(品等)에 따라 고하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체아직(遞兒職)으로 서용하였다.

역산소의 명칭이 실록에 세조대 이후로 사라진 것으로 보아 1466년(세조 12) 관제개정 때 서운관을 관상감으로 바꾸면서 역산소도 폐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역산학관이 6품(六品)으로 거관(去官)한 뒤에 서운관에서 서용하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천거가 된 경우가 거의 없었으므로 역산소의 운영이 부실해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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