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荔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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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환자나무과의 상록교목에서 열리는 둥글고 향긋한 과일.

개설

조선시대에 여지(荔枝)는 중국에서 들여와야 했기 때문에 무척 귀한 과실이었다. 민간에서는 거의 먹을 수 없었고, 여지를 재료로 한 음식 만드는 법을 소개한 기록도 찾아보기 어렵다. 여지는 왕실에서만 잔치나 제향 때 썼고, 생으로 또는 꿀에 재워 먹었다.

원산지 및 유통

여지의 원산지는 중국 남부로, 한국에서는 생산되지 않았다. 왕실에서 쓰이는 여지는 주로 중국에서 선물 받았거나 별도로 구매하여 들여온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때에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꿀에 담근 여자(荔子) 두 항아리를 받은 적이 있다(『세종실록』 1년 12월 18일). 태종 때에는 잔치를 베풀어 준 왕에게 명나라 사신이 여지를 바친 사례도 있었다(『태종실록』 11년 8월 16일). 세종과 세조 때에 걸쳐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조선 출신 환관 윤봉(尹鳳)은 왕과 중궁, 동궁에게 차등을 두어 물품을 바쳤는데, 이때 여지와 용안(龍眼)은 왕에게만 진상하였다(『세종실록』 7년 2월 13일)(『세종실록』 8년 3월 13일). 당시 조선에서 여지가 얼마나 귀한 과실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왕 가운데 여지를 가장 즐겨 먹었던 왕은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중국에 성절사(聖節使) 등의 사행을 보내면서, 오는 길에 여지와 용안을 많이 사 오도록 명하였다(『연산군일기』 3년 2월 20일)(『연산군일기』 3년 9월 29일). 윤필상(尹弼商) 등의 신하들이 여지 등은 어선(御膳)으로 소용될 뿐, 나라에 소용되는 물품이 아니니 무역을 줄이기를 건의하였다(『연산군일기』 8년 7월 6일).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사신에게 좋은 여지를 골라 많이 사 오라는 연산군의 요구는 계속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윤4월 4일)(『연산군일기』 11년 4월 6일)(『연산군일기』 11년 7월 8일)(『연산군일기』 12년 4월 25일).

중종 때에 이르러 여지 등은 먼 지방의 색다른 물품으로 폐주(廢主)인 연산군이 좋아하여 무역하게 하였다 하여 금하기로 결정하였다[『종종실록』 1년 9월 23일 2번째기사].

연원 및 용도

여지를 제례와 잔치 등의 의례음식으로 상에 올린 사례로는 주로 고종대의 기록이 남아 있다. 각종 다례발기와 다례단자에서 여지는 제수(祭需)에 포함되어 있었다. 각종 진연(進宴), 진찬(進饌) 등의 궁중잔치에 차렸던 진어상(進御床)이나 사찬상, 손님상 발기를 보아도 여지가 포함된 경우가 다수 있다. 이때 여지는 단독으로 1자 이상 높게 쌓거나, 주로 용안과 반반씩 섞어 고임을 올리기도 했다.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