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부(礪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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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여산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여량현감무(礪良縣監務)로 하여금 낭산현(朗山縣)을 겸임하게 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0년(정종 2)에 두 현의 이름을 따서 여산현으로 바꾸었다. 1409년(태종 9)에 여산현이 관할해 오던 2부곡을 여산현에 편입하였다. 1434년(세종 16)에 여산현을 충청도에 소속시켰다가, 1444년(세종 26)에 다시 전라도로 옮겼다. 1435년(세종 17)에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외향이라 하여 여산현을 군으로 승격시켰으며, 1698년(숙종 24)에 정순왕후(定順王后)의 고향이라 하여 여산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1455년(세조 1)에 여산군이 전라도 전주도(全州道)의 중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여산군은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전주진(全州鎭)에 속했다. 1669년(현종 10)에 익산에 설치한 영장(營將)을 여산으로 옮겼다가, 1711년(숙종 37)에 여산영장을 폐지하고 부사가 겸행하였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여산부에 별포군(別砲軍) 100명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여산부가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1018년(고려 현종 9)에 낭산현으로 고쳐서 전주에 소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1391년에 여량현감무로 하여금 낭산현을 겸임하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1400년에 두 현의 이름을 따서 여산현으로 불렀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같은 해에 낭산을 여량의 속현으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여산현이 관할해 오던 공촌(公村)과 피제(皮堤) 2부곡이 여산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이로써 그곳 주민들이 토호(土豪)나 향리(鄕吏)의 사적 지배에서 벗어나 점차 공민화(公民化)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산군에 종4품 군수(郡守)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군수는 종4품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여산군수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군수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군수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변천

1418년(세종 1)에 세종의 외조모 고향인 여산현의 명호(名號)를 올리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군현의 명호는 인구의 많고 적음으로 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세종이 허락하지 않았다(『세종실록』 즉위년 12월 29일). 1434년에 전라도 초입의 여산현을 충청도에 소속시키는 등 행정 구역의 조정이 있었다(『세종실록』 16년 12월 24일).

1435년에 원경왕후의 외향이라 하여 여산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세종실록』 17년 1월 21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1444년(세종 26)에 여산군을 다시 전라도에 소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1698년에 정순왕후의 관향(貫鄕)인 여산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숙종실록』 24년 12월 28일). 『증보문헌비고』에는 그 시기가 1699년(숙종 25)으로 되어 있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翼)에 분속시켰다. 여산을 비롯하여 전주·익산·금구를 전라도 전주도의 중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에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전주도 그중 하나이다. 여산을 비롯하여 용안·함열·익산·고산·금산·무주·용담·진안·금구·태인이 전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1654년(효종 5)에 전국의 군사제도가 개편되었다. 이때 전라도는 5영(營)을 두고 각 군현을 배속시켰다. 조선후기에는 여산에 전라후영(全羅後營)이 설치되었다. 후영(後營)의 속읍은 여산·익산·고산·금산·진산·용안·함열·임피·옥구·용담 10곳이며, 후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4초(哨), 속오(束伍) 34초, 표하군(標下軍) 317명, 당보군(塘報軍) 117명, 수솔군(隨率軍) 629명으로 되어 있다.

1669년(현종 10)에는 익산에 설치했던 영장을 여산으로 옮겨 다시 설치하였는데, 송시열의 아우인 송시도(宋時燾)가 익산군수로 있을 때 영장의 폐단을 이유로 들어서 요청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현종실록』 10년 2월 6일) (『현종개수실록』 10년 2월 6일). 1711년(숙종 37)에는 여산영장을 폐지하고 부사가 겸행하였다(『숙종실록』 37년 7월 8일).

1871년에 삼군부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여산부에 별포군 10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여산부가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북도는 수부(首府)를 전주에 두었으며, 여산군을 비롯한 26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1914년에는 그것을 익산군으로 통폐합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익산시사』, 익산시사편찬위원회, 2001.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