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가리(彦加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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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의 개국공신 슈무루[šumuru, 舒穆祿]씨 양구리[yangguri, 楊古利]의 한자 이름.

개설

양구리는 두만강 하류의 훈춘(渾春) 지역에 세거해온 동해여진 후르카[hūrka, 庫爾喀] 계열의 여진인으로, 어린 나이에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에게 보내져서 시위(侍衛)로 활동하였고, 이후 신임을 받아 후금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양구리는 누르하치의 딸을 처로 맞이하여 사위를 의미하는 어푸([額駙], efu)로 불리었고, 만주 정황기(正黃旗)에 속하였다. 1619년 심하(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조선군 도원수강홍립(姜弘立) 등이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과의 교섭에 자주 참가하였고, 1621년 후금을 방문한 조선 사절 정충신(鄭忠信)과 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다. 1636년 12월 청 태종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가 조선을 침공할 때 종군하였고, 이듬해 1월 광교산에서 전라도병마절도사김준룡(金俊龍)의 군대와 싸우던 중에 전사하였다.

가계

양구리의 아버지는 동해여진 후르카 부의 추장이던 랑주([郞柱], langju)였다. 랑주는 이후 부족인들에게 피살되었는데, 양구리의 모친이 양구리의 어린 동생 남타이([納穆泰], namtai)를 업은 채 일족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갔다. 1등총병관(一等總兵官)을 역임하였던 무양공(武襄公)렁거리([楞額禮], lenggeri)는 그의 동생이었다. 그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 아들인 탑첨(塔瞻)이 그의 뒤를 이어 초품공(超品公)을 세습하였고, 도르기 암반([內大臣], dorgi amban)이 되었다.

활동 사항

양구리는 누르하치를 따라 해서 여진 및 동해여진의 공격에 앞장섰고, 후금의 건국 이후 요동을 장악하는 데에 공로가 컸다. 특히 1599년 해서여진의 하다([哈達], hada) 부를 공격하면서 버일러 멍거블루([蒙格布祿], menggebulu)을 사로잡았고, 1619년에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 총병두송(杜松)과 마림(馬林)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몽골의 버일러 자이사이([齋賽], jaisai) 부자를 생포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요동의 중요 거점인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공격할 때 종군하여 후금이 명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는 데에 기여하였고, 이후에도 통주(通州)·계주(薊州)·대동(大同)·선부(宣府) 등을 공격할 때도 종군하였다.

양구리는 1619년 2월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후금을 공격할 때도 전공을 세웠는데, 이때 포로로 잡힌 조선군 지휘부와의 교섭에도 참가하였다. 1621년 만포첨사였던 정충신(鄭忠信)이 소롱귀(小弄貴)를 따라 후금을 방문하였을 때, 바두리([巴都禮], baduri)·다하이([大海], dahai) 등과 함께 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9월 10일). 이듬해에는 조선에 후금의 침입이 예상되면서 양구리에게 뇌물을 주어 이를 모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광해군일기』 14년 5월 13일).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양구리는 도로이 버일러([多羅貝勒], doroi beile), 요토([岳托], yoto)와 함께 전봉군의 세 번째 부대 3,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공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637년 1월 청의 전봉군은 각지에서 남한산성으로 집결하던 근왕군과 수차례의 전투를 치렀는데, 전라도병마절도사김준룡은 광교산에서 청군을 수차례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양구리는 조선군과 싸우던 도중에 전사하였다.

묘소

양구리는 병자호란 때 조선에서 전사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무덤이 남한산성 인근에 마련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 dodo)가 그의 시신을 거두어 왔다고 한다. 홍타이지는 친히 그에게 제사하고 어의(御衣)를 내렸으며, 심양으로 돌아간 뒤에는 누르하치의 무덤인 복릉(福陵)에 배장(陪葬)하였다.

상훈 및 추모

1637년 11월 홍타이지는 양구리를 무훈왕(武勳王)으로 추봉(追封)하였고, 이후 순치제(順治帝)는 칙지를 내려 태묘(太廟)에 그를 배향하도록 하였다. 1698년 강희제(康熙帝)는 심양을 방문하였을 때 양구리에게 친제를 지내고, 1700년에는 비석을 세워 그의 공적을 새겼다고 한다. 1731년 옹정제(雍正帝)는 그의 후손에 대한 세습 작위를 정하여 1등영성공(一等英誠公)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만문로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책중일록(柵中日錄)』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만주실록 역주』, 소명출판, 2014.
  •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1644~1912), Ch’eng Wen Publishing Company, 1972.
  • 張建, 「淸武勳王戰歿史事考」, 『滿族硏究』, 2009年 2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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