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회(魚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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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생선을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음식.

개설

민물생선이나 바다생선의 껍질과 뼈를 발라내고 초고추장이나 겨자즙에 찍어 먹는 음식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왕실에서나 민간에서 어회(魚膾)를 즐겨 먹었다. 왕실에서는 수라상에 올리기도 했지만, 잔칫상에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대비나 왕비의 잔칫상에는 때에 맞추어 어회를 올렸다. 왕실에서 사용했던 어회의 재료는 웅어·숭어·농어·쏘가리 등과 같이 한강에서 잡을 수 있는 민물생선이었다. 선비들은 순채국과 농어회와 관련된 중국의 고사를 응용한 시를 많이 지었고, 실제로 어회를 즐겨 먹었다.

내용 및 특징

어회는 주로 왕실의 잔치에 오른 음식 중에 포함되었다. 왕실 잔치에 오른 어회의 종류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찬품(饌品)」이다. 1795년(정조 19) 윤2월 10일 화성참에서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차려진 상에 오른 어회에는 숭어[秀魚] 두 마리가 재료로 쓰였다. 윤2월 13일 봉수당 진찬에서는 숭어 5마리와 농어[鱸魚] 5마리로 어회를 장만했다. 같은 날 화성참 아침 수라상에는 웅어[葦魚]로 만든 어회를 올렸다.

선비들도 시에서 어회를 자주 언급했는데, 특히 ‘순갱노회(蓴羹鱸膾)’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진서(晉書)』「문원전(文苑傳)」 ‘장한(張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한은 강남(江南)의 우군(吳郡: 현 장쑤성 쑤저우) 사람이다. 진나라 초기에 사마(司馬) 성을 가진 자제들을 대거 제후국의 왕으로 책봉할 때, 사마소(司馬昭)의 손자인 사마경(司馬冏)도 제왕(齊王)으로 책봉되었다. 장한은 당시 사마경의 관저에서 수레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사마경이 반드시 난(亂)으로 인해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종일 술만 마셔서 사람들로부터 ‘강동보병(江東步兵)’이라고 놀림을 당했다. 가을이 되자 장한은 고향 우군의 채소인 순채로 만든 국인 순갱(蓴羹)과 농어회인 노회(鱸膾)가 그리워졌다. 그는 사람의 일생은 뜻에 맞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하거늘, 하필이면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관직과 명예를 바라고 있는가 하면서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 사마경은 반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지만, 장한은 ‘순갱노회’로 인해서 다행히 난을 피했다. 선비들은 이 고사를 시에서 자주 언급했고, 어회를 직접 먹기도 했다.

어회는 효성 깊은 아들을 비유할 때도 쓰였다. 세종 때 강릉부에 거주하는 이장밀(李長密)의 아들 이성무(李成茂)·이선무(李善茂)·이춘무(李春茂)·이양무(李陽茂) 등은 79세의 어머니가 병이 들어 잉어회[鯉魚膾]를 맛보고 싶다고 하자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강에 들어가 잉어 한 마리를 잡아 어머니에게 어회를 쳐서 주었고, 어머니는 그 덕택에 병이 조금 나았다는 보고를 강원도감사가 했다(『세종실록』 13년 6월 25일). 성종 때 청주(淸州) 사람 경연(慶延)이 1월에 아버지를 위해 강에 들어가 생선을 잡아 어회를 만들어 주어 그 효성으로 왕의 부름을 받았다(『성종실록』 7년 6월 12일). 이로 인해 왕실에서도 왕을 비롯하여 대비와 왕비에게 약용으로 어회를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조는 설사를 자주 했는데 붕어회[鮒魚膾]를 먹고 차도가 있었다고 한다.

변천

왕실과 선비들이 어회를 즐겨 먹으면서 조선후기에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민물생선으로 만든 어회를 먹는 사례가 많아졌다. 심지어 동해안의 어민들 중에는 고래고기회[鯨魚膾]를 먹기도 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진서(晉書)』
  • 주영하, 「한 사대부 집안이 보여준 다채로운 식재료의 인류학:『음식디미방』과 조선중기 경상도 북부지역 사대부가의 식재료 수급」, 『선비의 멋, 규방의 맛』, 글항아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