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천역(魚川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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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의 도로망인 어천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평안북도 영변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조선전기 세조대에 전국적으로 역로(驛路)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어천역(魚川驛)은 어천도(魚川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처음에는 어천도의 본역(本驛)이었으나, 중종대 이후에 개평역(開平驛)으로 본역이 이설되었다. 그 뒤 조선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건양 1) 1월에 철폐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어천역의 설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따르면 고려시대 통로역(通路驛)이 『고려사』 「지리지」에 "철주(鐵州)의 옛 터에 있다고 했는데 영변의 어천역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통로역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어천역으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통로역은 운중도(雲中道)에 소속된 43개소의 역 가운데 하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삭주도호부 영변대도호부 편에는, 영변대도호부에는 말을 갈아타는 체마소(遞馬所)가 1개소인데 개평역(開平驛)에 합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천역이 설치된 평안도는 대(對)중국 외교 및 국방의 요지로, 조선 건국 이후 국가적으로 중시되는 지역이었다.

조직 및 역할

1895년(고종 32)에 간행된 『관서역지(關西驛誌)』에 따르면 어천역에는 아전 53명, 통인(通引) 20명, 백호(百戶) 15명, 색장(色掌) 1명, 사령(使令) 9명, 관군(館軍) 301명, 사장(蓑匠) 3명, 파적장(把赤匠) 3명, 차비(差備) 75명, 수노(首奴) 2명, 명고 고직(名庫庫直) 5명, 속안두목(續案頭目) 1명, 마두(馬頭) 20명, 도척(刀尺) 4명, 구종(驅從) 6명, 차역(差役) 2명, 응자(鷹子) 2명, 관직(館直) 2명, 석장(席匠) 2명, 상경(上京) 2명, 마직(馬直) 2명, 방자(房子) 6명, 착어(捉魚) 4명, 식모(食母) 3명, 다모(茶母) 3명, 채원(菜園) 3명, 갱척(羹尺) 3명, 세답(洗踏) 3명, 급수(汲水) 3명, 침장(針匠) 4명, 주탕(酒湯) 10명, 주모(酒母) 1명, 장비(醬婢) 1명이 배속되는 등 다양한 역민이 구성되었다. 그밖에 마호관군(馬戶館軍) 36명과 차역관군(差役館軍) 33명이 역마를 보충하거나 말 값을 내는 입마역(立馬役)을 부담하고, 여군(餘軍) 28명이 신공전(身貢錢)을 납부하였다. 마호관군에게는 마호고공(馬戶雇工) 266명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해당 연도의 신역전 2냥씩을 보역고(補驛庫)에 납부하였다. 또 수포고공(收布雇工) 288명은 보역고에 직접 납부하게 하여 여러 경비에 충당하였다. 그런데 이 고공의 수는 어천역과 수영(隨營) 및 개평역(開平驛)의 인원을 합한 수이므로, 실제 어천역의 고공은 이보다 적은 수였다.

한편, 평안도 내의 25개 군현 및 진(鎭)의 민결(民結)에서 징수한 총 11,450냥 2전 1푼의 복호결대전(復戶結代錢)이 어천도 속역의 마호에게 나누어 지급되었다. 복호결은 관군뿐 아니라 노비에게도 지급되었는데, 어천역의 경우 돈과 쌀로 징수한 총 3,449결 71부 6속의 복결(復結)을 마호관군·차역관군·차역노비·고공에게 나누어 주어 역마가(驛馬價) 및 역의 재정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그 외에도 공수위전세(公須位田稅)로 소미(小米) 65석, 태(太) 20석, 조 20석, 잡곡 80석, 세삼(稅蔘) 13냥 1전을 거두어들였다. 각 읍에서 거두어들인 쌀은 1,400냥 어치인 280석, 고공전(雇工錢)은 944냥, 본부 전세(本府田稅)는 293냥 1푼, 연준첨가전(年準添價錢)은 268냥 2전 8푼, 감포소(減布所)의 이자 수입은 642냥 7전, 견요소(蠲徭所) 수입은 78냥으로, 어천역의 총 세입가(稅入賈)는 약 15,075냥이었다.

변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중종대까지만 해도 어천역이 어천도의 본역이었으나 후에 개평역으로 본역이 이설되면서 어천역이 속역이 되고 개평역이 본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을 왕래하는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한 어천역에는 탐관오리가 찰방(察訪)으로 임명되어 마호 등의 입마(立馬)와 관련된 폐단이 자주 발생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2월 28일). 한편 영조대에는 송성명(宋成明)이 어천역관(魚川驛館)을 영변성 내로 옮기기를 청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8년 1월 13일).

어천역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변대도호부 편에 따르면, 어천(魚川) 북쪽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관서역지(關西驛誌)』
  • 『동사강목(東史綱目)』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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