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채조례(漁採條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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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6월 4일 외부(外部)에서 고시한 대한제국과 일본 양국 어민의 어로 행위 규제에 대한 조례.

개설

1876년(고종 13) 개항 이래 한국에서는 한반도 연안의 어장을 황폐화시키고 한국 어민들과 분쟁을 일삼던 일본 어민에 대한 저항이 지속되었다. 일본 어민은 한일 간 조약을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어로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한국인들의 어로 기구를 파손하고 심지어 개인재산을 약탈하기까지 하는 등 해적과 같은 소행을 일삼았다. 그들의 불법 어로행위는 전국에 걸쳐 벌어졌다. 특히 일본 어민들이 주목한 곳은 거문도와 제주도였다. 두 섬은 도민들이 아닌 육지 어민들의 어로활동이 많지 않던 곳이었다. 일본 어민은 이들 섬의 일부 지역을 불법 점거하면서 어로를 일삼고 어장을 황폐화시킬 정도로 어획고를 올렸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은 어로 작업 시 나체에 가까운 옷차림으로 우리나라 어민들과 문화적으로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일본인들은 한국인들보다 발달된 어구를 이용하여 많은 어획고를 올렸다. 특히 물속에서 장시간 버틸 수 있는 잠수기(潛水器)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던 것으로 해저 어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수단이었다. 이로 인해 제주 해녀들의 생계가 큰 타격을 입었다. 더욱이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일본이 득세한 다음부터 일본 어민들은 불법적으로 무리를 지어 제주도 등에 상륙하여 민가를 습격해서 가축 약탈, 부녀자 겁탈, 양민 살상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일본 어민들의 왜구와 같은 만행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야기하고 한일 간의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되어 어로 작업을 제한하고 조정하는 조례를 제정하게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일본 어민들은 조서시대에도 불법적으로 한국 연안에 나타나 어로 작업을 하였다. 그들은 언제든지 왜구로 돌변할 수 있는 준군사집단이라고도 할 무법집단이었다. 조선후기에 울릉도의 나무를 벌목하고 강치를 잡아가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일본인들이 합법적으로 한국 연안에서 어업을 하게 된 것은 1883년(고종 20) 체결된 한일통상장정 이후이다. 통상장정 41조에 따라 전라도와 경상도 연안에 일본인이 출어할 수 있고 한국인은 대마도 등의 일본 연안에서 조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 어민의 어로 기술로는 원양 항해가 용이치 않았다. 따라서 이 장정은 일본 어민의 한국 어업을 일방적으로 용인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통상장정 체결 7년 뒤인 1889년(고종 26)에는 전문 12조의 한일통어장정이 체결되었다. 한일통어장정은 통상장정 41조의 시행령 성격을 지닌 것이다. 통어(通漁) 수속, 어업세, 범법자 관련 규칙 등이 약정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의 한국 연안 어로 행위는 자유를 얻었고 한국 어민과의 충돌은 증가하였다. 1891년(고종 28) 전라감사와 제주목사 등이 올린 장계에 일본 어민들의 약탈적 어로행위 문제가 보고되었다. 당시 장계의 내용을 보면, 일본 배들은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갑자기 와서 정박하고는 한국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를 걸핏하면 약탈하며 어부들을 묶어놓거나 때리고 물에 처넣기까지 하였다. 한국 어부들이 배에 올라 저지하면 총과 칼로 인명을 해쳤고, 민가에 돌입하여 부녀자들을 위협하고 양식과 옷, 닭과 돼지 등을 약탈하여 가는 등 온갖 행패를 자행하는 상황이었다(『고종실록』 28년 8월 22일). 이와 같은 사정으로 1900년(광무 4) 외무행정을 관할하던 중앙관청인 외부에서는 일본공사관에 어업 문제의 조정을 요청하였다. 외부대신 박제순이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에게 보낸 공문은 경기지역의 어로를 새롭게 개방하는 것과 일본 어민들이 한국인의 어업을 방해하는 경우 징계 및 조사한 후 처리하자는 것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후 1904년 양국은 어채조례를 체결하여 어업 문제를 조정하려고 하였다.

내용

1904년(광무 8) 6월 4일 외부에서는 한일 양국인민 어채조례(韓日兩國人民魚採條例)를 고시하였다. 조례는 5가지로 첫째, 한일 양국 인민들이 두 나라의 바닷가를 오가면서 고기잡이 하는 것은 이미 토의하여 정한 지방을 제외하고 한국은 충청도·황해도·평안도 세 도의 연안에서 일본인들에게 고기잡이 하는 것을 허락하며 일본도 백기(伯耆)·인번(因幡)·단마(但馬)·단후(丹後) 및 구주(九州) 연안에서 한국인에게 고기잡이하는 것을 허용한다. 둘째, 충청도·황해도·평안도 세 도의 연해에서 일본 인민들이 고기잡이하는 기한은 광무 8년(1904년) 6월 4일부터 20년으로 정한다. 셋째, 백기·인번·단마·단후 및 구주 연해에서 한국 인민들이 고기잡이하는 기한도 광무 8년 6월 4일부터 20년으로 정한다. 넷째, 일본 인민들은 한인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곳에서 그들이 고기잡이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으며 위반하는 자는 징벌한다. 혹시 제멋대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자는 부근의 영사(領事)에게 압송해 보내어 엄격하게 신문하여 처리한다. 다섯째, 상세한 조항과 규정은 모두 통어장정(通漁章程)에 의하여 시행한다. (『고종실록』 8년 6월 4일)

변천

1905년(광무 9)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 어민의 대한제국 연안의 어업은 법적으로 자유롭게 진행되었으며, 기존의 규제들은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강만생, 「韓末 日本의 濟州어업 침탈과 島民의 대응」, 『濟州島硏究』3, 제주학회, 1986.
  • 김현희, 「韓末 濟州島의 通漁問題에 대하여」, 『제주사학』3, 1987.
  • 박구병, 「19世紀末(李朝末) 韓·日間의 漁業에 適用된 領海 3海里 原則에 관하여」, 『韓日硏究』1, 한국경제학회, 1974.
  • 이원순, 「韓末 濟州道通漁問題 一攷」, 『역사교육』10, 역사교육연구회, 1967.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