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화(御賜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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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왕이 하사한 종이꽃.

개설

문과와 무과에 급제한 사람들은 창방의(唱榜儀)라는 행사에서 왕에게 홍패(紅牌)를 하사받고, 일산(日傘)과 함께 어사화(御賜花)도 하사받았다. 급제자들은 어사화를 머리에 꽂은 채 말을 타고 유가(遊街)를 함으로써 어사화는 급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문과와 무과의 선발 인원이 증가하면서 급제의 격이나 의미가 줄어들게 되었는데, 이를 반영하듯이 특히 무과의 경우에는 급제자가 창방의가 끝난 뒤에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홍패를 안은 채 거리를 도보로 걸어 다니는 경우도 생겨났다.

내용 및 특징

문과와 무과에 급제한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실시된 것이 합격 증서를 수여하는 창방의였다. 이 행사는 방방의(放榜儀)라고도 불렸는데, 왕이 직접 참석하고 문반과 무반의 모든 관원과 급제자의 부모 형제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여기에서 문과 급제자는 오른쪽, 무과 급제자는 왼쪽에 정렬한 뒤, 호명(呼名)에 따라서 왕에게 네 번 절하는 사배례(四拜禮)를 올리고 나서 합격 증서인 홍패를 비롯한 술과 과일 등을 하사받았으며, 이때 일산과 함께 어사화를 하사받았다(『태종실록』 7년 4월 22일).

급제자들이 하사받은 어사화는 이후 진행되는 거리를 행진하는 유가(遊街)에서 선보이게 되는데, 어사화는 길이가 약 90㎝의 가느다란 참대오리 2개를 종이로 감고 비틀어 꼬아서 군데군데 다홍색·보라색·노랑색 등의 꽃송이를 꿴 것이었다. 유가를 할 때 급제자들은 어사화의 한끝을 복두(幞頭)의 뒤에 꽂고, 다른 한끝은 명주실로 잡아매어 머리 위로 휘어 넘겨서 실을 입에 물고 유가를 하였다. 지방 출신의 급제자들은 서울에서의 유가를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갔다. 각 지방에서는 신은들이 귀향하는 날 고을 사람들과 관원들이 모두 나와 환영하였고, 급제자들은 자기 고향에서도 유가를 하였다.

변천

엄숙한 창방의 행사에서 왕에게 하사받은 어사화는 문과와 무과의 급제자에게 있어서 급제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그 상징은 어사화를 꽂은 급제자가 말을 타고 서서히 유가를 하는 것에서 빛을 발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문과와 무과에서 선발하는 인원이 많아졌는데, 특히 급제자가 급증하였던 무과의 경우에는 창방의를 치르는 과정에서 홍패와 어사화 등을 제수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행사장이 소란스러워져 이전의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어떤 무과 급제자는 창방의가 끝난 뒤에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홍패를 안은 채 거리를 도보로 걸어 다녀 “왕의 은혜를 더럽혔다.”는 한탄이 나오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1년 3월 22일).

참고문헌

  • 차미희, 『조선시대 과거시험과 유생의 삶』,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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