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신(魚飛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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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선교사이자 의사로 제중원 원장 및 고종의 주치의를 맡았던 인물.

개설

어비신은 에비슨(Oliver R. Avison)의 한자식 표기이다. 영국 요크셔에서 출생한 에비슨은 1866년에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그는 1879년에 오타와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884년에 토론토의 온타리오 약학교, 1887년에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892년에 호레이스 언더우드([元杜尤], Underwood, Horace Grant)의 추천으로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부의 의료 선교사가 되어서 1893년 8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에비슨은 1894년에 제4대 제중원(濟衆院) 원장이 되었으며, 후에 세브란스 병원의 병원장 및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학교장이 되었다. 1915년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학교(연희전문학교의 전신)를 개교하자 부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언더우드 사망 이후에는 교장이 되었다. 에비슨은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통합을 모색하였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실현을 거두지 못하였다. 1934년에 에비슨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으며, 1935년 12월에 조선을 떠났다. 1956년에 미국 플로리다에서 사망하였다.

가계

에비슨의 4남 더글라스 에비슨(Douglas B. Avison)은 1926년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보건학박사를 받은 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소아과 교수 및 위생학 교수·병원장·부교장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에비슨은 조선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종의 피부병을 치료하였다. 그로 인하여 에비슨은 제중원 원장이자 고종의 주치의가 되었다. 조선 정부가 제중원에 대한 지원을 소홀히 하자, 에비슨은 제중원 원장직을 사임하려고 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제중원의 운영을 선교부로 이관하였으며, 제중원은 조선 정부와 미국 선교부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그 후 에비슨이 미국인 사업가 루이 세브란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서 1904년에 제중원을 신축하고 병원 이름을 세브란스 병원으로 변경하였다.

1895년에 조선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에비슨은 조선 정부로부터 방역 책임자로 임명받아서 체계적인 방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에비슨은 한국어로 된 의학 교재를 출판하는 한편 한국인들에게 의학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한국의 의학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 결과 1908년에 7명의 첫 한국인 의과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다. 에비슨의 의료 활동을 높게 평가한 고종은 1906년에 언더우드와 함께 훈4등에 서훈하고 태극장을 하사하였다(『고종실록』 43년 4월 28일).

저술 및 작품

Memoirs of Life in Korea, 1940.

(에비슨 기념사업회 역, 『구한말비록』 상·하, 대구대학교 출판부, 1984.)

상훈 및 추모

1906년 대한제국 훈4등 태극장(太極章)

1952년 대만민국 건국공로훈장

참고문헌

  • 박성래, 『인물과학사』, 책과함께, 2011.
  • 박성래, 「역사속 과학인물-세브란스 설립한 캐나다 의사 ‘에비슨(1860~1956년)’」, 『과학과 기술』 35-9, 2002.
  • 박형우, 「올리버 알 에비슨(1860~1956)의 생애」, 『연세의사학』 13, 2010.
  • 이기훈, 「에비슨과 일제하 고등교육-세브란스, 연희전문을 중심으로」, 『연세의사학』 13, 2010.
  • 이만열, 「제중원과 에비슨」, 『연세의사학』 18, 2015.
  • 이만열, 「한국 의료선교와 에비슨」, 『연세의사학』 13, 2010.
  • 이선호, 박형우, 「올리버 알 에비슨(Oliver R. Avison)의 의료선교사 지원과 내한 과정」, 『역사와 경계』 84, 2012.
  • 이영식,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 Avison)의 생애와 한국에서의 선교활동」, 『역사신학 논총』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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