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기(御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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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에서 왕이 사용하는 그릇.

개설

어기(御器)는 왕실에서 왕이 사용한 그릇이다. 조선전기의 어기로는 금·은·동과 같이 금속으로 제작한 그릇과, 백자처럼 자기로 만든 그릇을 주로 사용하였다. 붉은색 칠을 한 주칠기(朱漆器) 역시 어기로 사용되었다. 세종 이후에는 백자가 금속제 그릇과 함께 어기로 사용되었다. 15세기 사옹원(司饔院)의 관요(官窯)가 성립된 이후에는 백자가 어기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관요의 민영화 시기까지 이어졌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은 유교적인 신분 질서를 엄하게 지켰으므로 생활 전반에서 왕과 신하, 주인과 종,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그릇에도 적용되었다. 특히 왕이 사용하는 그릇은 어기라고 하여 대소 신료를 위한 그릇과 분명하게 구분했다. 어기는 오직 왕을 위한 그릇으로 세자(世子)나 왕비의 그릇과도 구분하였다. 왕족이라 할지라도 왕의 그릇과 뒤섞어 함께 사용할 수 없었으며 만약 어겼을 경우에는 처벌을 받았다. 어기는 왕을 위한 그릇으로 특별하게 관리되었다.

어기는 왕의 그릇이라는 뜻으로 특별한 재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어기는 금·은 혹은 금으로 도금한 은으로 제작되었으며, 백자로도 만들어졌다.

어기의 관리는 사옹원에서 맡았다. 사옹원의 주된 임무는 왕의 식사[御膳]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사옹원은 왕의 식사 즉 수라를 담당했으므로 음식을 만들기 위한 식재료의 확보에서부터 음식의 조리와 음식을 담을 그릇까지 모두 관리했다. 사옹원의 전신인 사옹방(司饔房)에는 은그릇과 같은 왕의 식기를 관리하는 담당자가 별도로 여러 명 배정되었다(『세조실록』 7년 3월 13일).

조선시대 왕의 그릇은 금이나 은과 같은 금속기로 주로 제작되었다. 특히 은으로 만든 그릇은 독이 닿으면 산화되어 색이 검게 변하는 특성 때문에 어기로 많이 이용되었다. 어기는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그릇이었으므로 간혹 훔쳐 가는 자들이 있었다. 어기는 왕의 그릇으로 관리를 철저하게 했지만 궁궐 안에서 일하는 환관이나 노비와 같이 궁궐의 창고에 드나들 수 있는 자들이 어기를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었다(『중종실록』 23년 8월 18일).

어기를 훔치는 죄는 사형(死刑)에 해당했으므로 실제로 참수하지 않더라도 어기를 훔친 자는 신분에 따라 관서의 노비로 삼거나 먼 섬으로 유배시키는 중형에 처했다(『세조실록』 12년 9월 29일), (『영조실록』 10년 9월 27일), (『영조실록』 39년 1월 21일).

조선전기에 세종은 궁궐 안팎에 왕실의 검소함을 알리기 위하여 금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이 아닌 칠기나 백자를 어기로 삼았다. 조선전기에 사옹원 정(正)과 공조(工曹) 판서(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세종 연간에 백자를 어기로 사용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실제로 조선 왕실은 사치를 금하기 위해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그릇은 궁궐에서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인하여 금그릇이나 은그릇을 사사로이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키지는 못했다.

변천

조선시대에는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그릇 외에도 백자가 대표적인 어기로 사용되었다. 백자는 그릇의 색이 희고 맑았으므로 고결하고 우아한 멋을 추구한 조선 왕실과 사대부의 취향과도 잘 어울렸다. 어기로 사용되는 백자의 제작은 사옹원이 관리하였으며, 어기는 정교하게 만들어 궁궐 안의 다른 사람들이 쓰는 그릇과 구별하였다.

사옹원에서는 어기로 사용되는 백자를 제작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의 자기소를 관요로 삼았다. 경기도 광주는 백자 제작을 위한 원료, 땔감, 용수(用水), 장인(匠人) 등이 잘 갖추어진 곳이었다. 특히 광주는 한양의 궁궐과 관서에서 사용하는 땔감은 물론 도성에 거주하는 여러 왕족이 사용하는 땔감까지 확보할 수 있을 만큼 나무가 울창했다. 따라서 사옹원은 광주의 자기소에서 어기를 비롯하여 필요한 백자를 제작할 수 있었다.

왕은 신하의 공덕을 치하하거나 힘든 일을 겪은 인물을 위로하기 위하여 술[宣醞]과 음식[宣飯]을 내려주었다. 이때 어기에 술과 음식을 담아 하사했는데, 어기를 받은 신하들은 매우 큰 영광으로 인식했다. 이런 까닭에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가 궁궐 밖에서도 출토되고 도성 이외의 지방에서도 확인된다. 어기라 할지라도 백자로 제작된 그릇은 지속적인 사용에 의해 수량이 줄었으므로 사옹원의 관리하에 매년 새로 만들어져 궁궐로 납부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백자의 제작 기술이 발달하고 사치품의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갑번(匣燔)으로 만들어진 백자가 늘어나고 청화 안료로 문양을 그린 백자도 많아졌다. 어기로 사용될 백자는 특히 정교하게 제작되었으며 기종도 다양해졌다. 이러한 변화상은 조선후기에 여유로워진 경제적 상황과 식생활의 발달이 반영된 것이다.

19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관리들의 전반적인 부패와 기강의 해이를 겪었다. 경기도 광주 관요 역시 이러한 사회 상황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았다. 관요에서 제작된 어기도 궁궐로 진상되는 과정에서 여러 관리에 의해 유출되었다. 이러한 관요 운영의 모순과 한계를 해결하고자 민영화라는 조치가 취해졌다. 민영화 이후 궁궐에서 필요한 어기는 구입하여 조달했고, 일본 등 서구 열강과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는 외국의 다양한 그릇을 구매하여 어기로 사용했다.

참고문헌

  • 『용재총화(慵齋叢話)』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 박정민, 「조선 전기 명문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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