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택(陽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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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이 거주하거나 활동하기 위한 지표면 위의 터.

개설

풍수지리는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구별된다. 무덤 선정과 관련한 풍수를 음택 풍수라고 하고, 산 사람이 관련된 풍수를 양택 풍수라고 한다. 양택 풍수에 대해서는 양택과 양기(陽基)로 세분하기도 하지만 조선초기에는 그와 같은 구분을 하지 않고 양택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음택과 양택를 구분하는 이유는 그에 따라 입지 선정 기준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초기 경복궁 입지에 대한 진혈·가혈 논쟁이 있었을 때 양택 풍수지리에 관한 관심이 급증하였다. 현재는 도읍과 관련된 풍수지리를 달리 국도풍수라 하고 여러 사람이 모인 곳, 즉 마을, 도시 등과 관련해서는 양기풍수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내용 및 특징

기존에는 『황제택경(黃帝宅經)』을 가장 오래된 양택 문헌으로 봤지만, 간백 문헌(簡帛文獻)인 「택거(宅居)」가 발견됨으로써 진한 시대에도 방위와 입지의 고저, 수류 등과 결부하여 인사의 길흉을 논한 양택에 대한 이론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양택 풍수의 발달은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그 내용이 확대 혹은 변화되어 18세기에 출간된 『양택촬요(陽宅撮要)』는 중국 청대에 이르러 양택 풍수술이 매우 발달되었음을 보여준다.

음택과 양택 혹은 양기 풍수와의 차이는 규모의 차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으나, 『양택촬요』는 음택에서는 내룡을 보고, 양택에서는 조산의 영송을 봐야 한다고 그 본질적 차이를 적시하고 있다. 『인자수지(人子須知)』는 좀 더 자세히 양기의 입지를 선정할 때의 주의점을 논하고 있는데, 양기나 음택이나 그 대강은 차이가 없지만, 내룡(來龍)이 길게 내려와야 하고 혈은 광활해야 하며, 물은 반드시 크게 합류하여 완만하게 꺾여 들어와야 하고, 사(砂)는 반드시 크게 멀리서부터 조공하는 형태여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조선후기 지관 선발 고시과목으로 채택된 『탁옥부(琢玉賦)』는 음택은 내룡 한 줄기를 찾는 것임에 반해 양택은 한 조각을 찾는 것이라 하여 선과 면의 차이로 설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양택 풍수가 문제가 되는 것은 경복궁이 진혈인가 가혈인가의 논쟁이 있을 때였다.

세종 때 상지관이었던 최양선(崔揚善)이 경복궁이 진혈이 아니라는 논쟁을 일으킨 뒤 그 이후에 결론 없이 지속적인 논의가 지속된다. 30여 년 후인 1464년(세조 10) 또 다른 상지관최연원(崔演元)이 경복궁이 진혈임을 주장하는 근거로써 양택의 진혈 요건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면서 양택 문제가 다시 불거진다. 최연원은 『의룡경(疑龍經)』을 근거로 양택의 진혈 요건을 설명하고 있다. 양택은 혈이 커야 하므로, 넓고 면면하며 또 평평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이라야 바야흐로 살 수 있는 양택이 되니, 좁고 작아서 쓰기 어려운 것에 사람들은 연연해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백악산(白岳山) 아래 경복궁 터는 넓고 크고 바르면서 평평하므로 진혈임이 분명하다는 주장이다(『세조실록』 10년 9월 7일). 결국 음택과 양택의 차이는 『의룡경』과 『착맥부(捉脈賦)』의 개념과 정의대로 혈의 규모의 차이, 명당의 넓고 좁음의 차이가 일종의 구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변천

조선시대에 양택에 대한 이론은 주로 지형지세의 생김새를 두고 그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보다 다양한 양택 풍수 이론과 주장이 전개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같은 구별이 없이 ‘양택’이란 명칭으로 경복궁 터의 문제점을 논하고 있어 양택에 양기라는 개념이 함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경(書經)』을 보면 애초에 택(宅)이라는 용어가 여러 사람이 사는 도읍지의 의미였고, 국제적으로도 양택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양택을 양기(陽基) 또는 택기(宅基)라는 용어로 설명한 것은 명대의 『인자수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양택 풍수와 양기 풍수를 굳이 나누는 것보다는 두 용어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의 거주지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엄밀히 말해서 양기는 집터인 땅을 논하는 일이고, 양택은 그 위에 건축된 집의 좌향(坐向)과 구조를 논하는 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조선전기와 중기에는 양택 풍수의 유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그 지형지세의 생김새를 가지고서만 논했을 뿐인데, 조선후기 혹은 일제시대가 되면서 양택 풍수는 두 가지 유파로 나뉜다. 하나는 마을이나 도읍이 들어설 곳이 배산임수(背山臨水)하고, 명당은 넓고 평탄하며, 수구는 잘 맞물려 있고, 앞쪽은 낮고 뒤쪽은 높으며, 앞의 마무리 부분은 좁지만 뒤의 쓰임새 부분은 넓어야 이상적이라는, 주로 형세를 위주로 하는 유파이다. 이런 주장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청대의 『양택삼요(陽宅三要)』의 주요 내용과 맥락을 같이한다.

참고문헌

  • 『서경(書經)』
  • 『양택삼요(양택삼요)』
  • 『양택촬요(陽宅撮要)』
  • 『탁옥부(琢玉斧)』「택거(宅居)」『황제택경(黃帝宅經)』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김혜정, 『중국 고전의 풍수지리 사상』, ㈜한국학술정보, 2008.
  • 양균송 저·김두규 교감 역주, 『감룡경·의룡경』, 비봉출판사, 2009.
  • 장성규·김혜정, 『완역 풍수경전』, 문예원, 2010.
  • 村山智順 저·최길성 옮김, 『조선의 풍수』, 민음사, 1990.
  • 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 민음사, 1984.
  • 徐善繼·徐善述, 『地理人子須知』, 臺灣, 竹林書局,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