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원(梁之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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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명에서 조선으로 파견한 원병 요청 사절단의 대표.

개설

양지원은 명나라에서 후금 정벌을 위한 원병을 요청하고자 조선에 파견한 사절단 대표였다. 그는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에서 출발하여 1622년 3월 평안도 용천(龍川) 미곶(彌串)에 도착하였다. 4월 중에 한양으로 들어가 두 달 정도 활동한 후, 해로를 통하여 명나라로 돌아갔다. 귀국 후 조정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빼앗기고 낙향하였다.

활동 사항

양지원은 명나라의 관료로 1606년 거인(擧人), 1607년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같은 해 양곡지현(陽曲知縣)에 제수되고, 그 후 병부 주사(兵部主事)에 올랐다가 부모상을 이유로 고향에 돌아왔다.

1621년 명은 후금(後金)에게 심양(瀋陽)·요양(遼陽) 등을 빼앗기고 전세가 불리해지는 상황이었다. 요동경략(遼東經略)웅정필(熊廷弼)은 조선에서 원군을 동원하여 그 병력을 압록강 근처에 두고 명군과 힘을 합쳐 후금을 공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양지원은 웅정필의 추천으로 감군(監軍)에 임명되어 원군을 요청하는 임무를 가지고 조선에 건너갔다. 당시 공식 직함은 흠차선유조선초무요중요동남로행감군도하남안찰사부사(欽差宣諭朝鮮招撫遼衆遼東南路行監軍道河南按察司副使)였다.

조선에 들어온 양지원은 조선 병력을 징발하여 변장을 지키게 하고 명군과 연합작전을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 측에서 명군의 군량을 조달할 것(『광해군일기』 14년 5월 6일)과, 요동 난민을 등주로 운송할 선박을 조달(『광해군일기』 14년 4월 22일)하라고 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한편 양지원은 이전 명에서 파견된 사신들과 마찬가지로 각종 명목으로 수만 냥의 은을 모아 가져갔다. 귀국 이후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70,000냥의 은을 추징당하게 되었으니, 조선의 기록에서는 그를 탐욕스럽고 염치가 없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광해군일기』 14년 4월 18일).

저술 및 작품

『병감(兵鑑)』·『동유초(東游草)』(현재 전하지 않음)

상훈 및 추모

사후 산동성(山東省) 봉래(蓬莱)에 있는 향현사(鄕賢祠)에 향사되었다. 향현사는 산동성 등주(登州) 출신의 명현들을 모신 사당이다.

참고문헌

  • 『도광중수봉래현지(道光重修蓬萊縣志)』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박현규, 「명 감군 양지원 조선출사 시기 해상활동에 관한 분석」, 『한중인문학연구』 39, 한중인문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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