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목(楊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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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양주 지방을 관할하던 지방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양주(楊州)는 조선이 건국한 후인 1395년(태조 4)에 아전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이전시키고 양주군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비롯하였다. 그 후 1397년(태조 6)에 양주부(楊州府), 1413년(태종 13)에 양주도호부(楊州都護府), 1466년(세조 12)에 비로소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한성부 양주군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13도제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다시 경기도 양주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양주는 본래 고구려매성군(買省郡)인데 고려 초에 견주(見州)로 승격되었고, 고려 1017년(고려 현종 9)에는 양주(楊州)에 예속되었다. 조선이 개창한 후 1394년(태조 3)에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면서, 양주의 관아를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에 옮기고, 강등하여 양주지사(楊州知事)가 되었다가 1397년(태조 6)에 다시 승격하여 부(府)가 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양주도호부가 되었으며, 1466년(세조 12)에 진(鎭)을 설치하고 목(牧)으로 승격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 잠시 읍이 폐지된 것을 제외하고 전 기간에 걸쳐 양주를 통치하였다. 양주는 파주와 고양군, 영평현, 포천현, 적성현, 교하현, 가평현 등 1주 1군 5현을 관할하는 지방행정구역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양주목에는 목사(牧使)와 교수(敎授) 각 1명을 두었다. 교수는 지방 향교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부와 목에 두었으나, 무록관(無祿官)이기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에서 자치규약인 향약 등이 활발하게 운영됨으로써 조선후기에는 모두 폐지시켰다. 3품의 병마절제사겸중영장 아래 좌수 1명, 별감 3명, 아전 60명을 두었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그 운영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목에는 대개 4~5명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임무는 6방을 분장해서 좌수가 이·병방을, 좌별감이 호·예방을, 우별감이 형·공방을 맡아 목사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조선이 건국한 직후인 1394년(태조 3)에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면서, 양주의 치소(治所)를 동촌 대동리로 옮기면서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95년(태조 4)에 양주부로 승격시켜 부사(府使)를 두었다. 1397년(태조 6)에 다시 양주의 치소를 고려시대 견주의 옛터인 양주시 고읍동으로 옮겼다.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견주는 신라 때 내소군(來蘇郡)이었는데, 고려 때 견주로 고쳐 1668년(현종 9)에 양주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9년(세종 1)에 포천의 속현이던 풍양을 양주도호부에 소속시켰다. 1466년(세조 12)에는 양주도호부를 양주목으로 승격시키고 진(鎭)을 설치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1504년(연산군 10)에 읍을 폐지하였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설치하였다. 그리고 치소를 오늘날의 양주시 유양동의 불곡산 부근에 새로 조성하였다. 1683년(숙종 9)에 양주목사가 방어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한성부 양주군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13도제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다시 경기도 양주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양주목(楊州牧)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京畿道) 양주목(楊州牧)
  • 이도남, 「조선시대 양주지방사 연구」,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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