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재(養正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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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가 탄생한 집이자 경복궁 후원 경농재 일곽의 북행각.

개설

숙종 계비 인원왕후는 순화방에 있는 외증조부 조희일(趙希逸)의 사저 양정재에서 탄생하였다. 영조는 인원왕후의 지지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인원왕후에 대한 효도와 추모를 각별히 했다.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사당인 육상궁에 갈 때 인원왕후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양정재에 들르곤 했으며 그 위치는 육상궁의 동편 담장 밖이었다고 한다(『영조실록』 46년 9월 25일).

여기에 영조의 어필이 있었기 때문에 정조 또한 육상궁에 행행할 때 재숙하는 장소로 이용하면서 재실을 보수하는 등 관심을 기울였다(『정조실록』 9년 1월 3일). 고종 또한 경복궁을 중건하던 시기에 이곳을 살펴보도록 했다. 이처럼 양정재는 영조 이래로 왕의 관심을 받아서 고종대까지 궁궐 내에서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위치 및 용도

양정재는 원래 사대부의 제택(第宅)이었다. 신무문(神武門) 밖 육상궁의 동쪽에 있었으며 고종대에 경복궁의 후원 권역에 포함되었다.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신무문 북쪽의 후원에 팔도의 모양대로 구획한 팔도배미를 만들어 국왕이 각 도에서 들어온 종자로 경작하고 농사를 독려하는 곳으로 조성했다. 영역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으며 궁궐을 수비하는 처소와 함께 양정재가 있었다. 이 영역의 중심 건물인 경농재(慶農齋)는 1893년(고종 30)에 조성되는데, 이때 양정재는 경농재 일곽의 보조 역할을 하는 행각의 일부가 되었다.

변천 및 현황

고종후기 1890년대를 전후하여 경복궁 후원 영역의 큰 변화는 경농재 일곽의 조성이었다. 경농재와 그 동쪽에 있는 대유헌(大有軒)은 1893년에 건립했는데 고종이 직접 상량문을 지어 농사를 격려하고 풍년을 바라는 뜻을 담았다. 경농재와 대유헌은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 관사로 사용되었으며 1939년 삼청동 약수터로 이전했다고 한다.

형태

1888년(고종 25)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복궁후원배치도(景福宮後苑配置圖)」에서는 아직 경농재가 지어지기 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면 7칸, 측면 1칸 반의 도청(都廳) 건물 서쪽 끝에 양정재라고 적혀 있다.

후원 서쪽 궁장의 사주문은 금화문(金華門)이고, 그 남쪽에 있는 추성문(秋成門)은 2칸이다. 추성문을 들어서면 북쪽에 화풍문(和豊門)과 담장이 있는데, 화풍문 북쪽이 팔도배미와 경농재 일곽이다. 양정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후원에서 가장 나중에 조성된 곳이다.

이 영역의 중심 건물인 경농재는 규모가 18칸으로 전면에 2칸 덧붙여 관풍루(觀風樓)가 있다. 그 동쪽에 대유헌 8칸이 있고, 경농재 서쪽에는 지희실(至喜室)이 있다.

주요 건물들은 남향을 하고 일렬로 있으며 그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내행각과 외행각이 있다. 내행각 밖으로 동쪽에는 군인들이 활쏘기를 훈련하는 중일각(中日閣)이 있다. 경농재 북쪽의 후대문(厚戴門) 안에 북행각이 있는데 그중 6칸 규모의 양정재가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85년(정조 9) 양정재를 보수하면서 인원왕후 후손인 전 현감(縣監) 조기현(趙基顯)을 등용하라고 명하였다(『정조실록』 9년 1월 3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志)』
  • 『주연선집(珠淵選集)』「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후원도형(北闕後園圖形)」
  • 『동아일보(東亞日報)』 1921년 5월 22일; 1939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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